밤이 깊어질수록 도시의 소음은 희미해지고, 정아 할머니의 낡은 아파트는 고요의 품에 안겼다. 창밖으로 보이는 것은 뿌연 밤하늘과 그 위에 흐릿하게 박힌 몇 개의 별들뿐이었다. 할머니는 익숙한 손길로 낡은 라디오의 다이얼을 돌렸다. 지직거리는 잡음을 뚫고 흘러나오는 다정한 목소리, 그것은 할머니의 유일한 밤의 동반자였다.
“별이 빛나는 밤의 라디오, 김지훈입니다. 오늘 밤도 많은 분이 함께해주고 계시네요. 여러분의 밤은 어떤 빛깔인가요? 혹시 여러분의 마음속에도 저 멀리 우주처럼 광활한 이야기가 숨 쉬고 있다면, 지금 바로 제게 들려주세요.”
할머니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내 밤은… 이제 너무 어둡지.”
흐릿한 별, 뚜렷한 기억
정아 할머니의 시력은 몇 년 전부터 급격히 나빠지기 시작했다. 한때는 망원경을 통해 별똥별의 꼬리까지 생생하게 추적했던 예리한 눈이었지만, 이제는 눈앞의 찻잔조차 흐릿하게 보일 때가 많았다. 거실 한편, 검은 천으로 덮인 낡은 망원경은 한 시대의 영광을 뒤로한 채 먼지만 쌓여가고 있었다. 남편과의 추억이 고스란히 담긴 물건이었다.
“저 별 좀 봐, 정아야. 저건 우리의 별이야.”
젊은 날의 남편은 늘 그렇게 속삭였다. 두 사람은 밤마다 작은 언덕에 올라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도시의 불빛이 지금처럼 강하지 않던 시절, 하늘은 검은 벨벳 위에 다이아몬드를 흩뿌려놓은 듯 찬란했다. 그는 언제나 할머니에게 별자리를 가르쳐주었고, 할머니는 그의 설명에 귀 기울이며 별들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그 별들이 두 사람의 사랑을, 희망을, 그리고 약속을 지켜보는 증인이었다.
“별들은 언제나 제자리에 있잖아. 우리도 변치 말자.”
남편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듯했다. 하지만 시간은 모든 것을 변화시켰다. 남편은 십 년 전 먼저 별이 되었고, 할머니의 시력은 별들을 볼 수 없게 만들었다. 이제 남은 것은 흐릿한 기억과,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라디오 소리뿐이었다.
라디오 속의 별자리
김지훈 DJ의 목소리는 밤하늘처럼 잔잔했다. 오늘 방송은 ‘가장 기억에 남는 별자리’라는 주제로 사연을 소개하고 있었다.
DJ 김지훈의 코너: “내 마음의 별”
“다음 사연은 40대 남성 강민준 님의 사연입니다. ‘어릴 적 아버지와 함께 봤던 오리온자리가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추운 겨울밤, 아버지의 큰 손이 제 손을 잡고 밤하늘을 가리키며 별을 세던 그 순간들이 저에게는 영원한 추억입니다. 아버지는 이제 제 곁에 안 계시지만, 겨울밤 오리온자리를 볼 때마다 아버지가 저를 지켜보고 계시는 것 같아요. 그 별들이 저에게는 가장 따뜻한 위로입니다.’”
정아 할머니는 눈을 감았다. 오리온. 그 별자리도 남편과의 추억이 깃든 별이었다. 남편은 할머니에게 오리온의 허리띠에 있는 세 개의 밝은 별이 ‘삼태성’이라 불리며, 세 쌍둥이 형제처럼 늘 함께한다고 설명해 주었다. “우리도 저 별들처럼 늘 함께 하자”고 말했었다.
“아, 삼태성….”
할머니는 어느새 옅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순간, 김지훈 DJ의 목소리가 할머니의 마음에 파고들었다.
“문득 궁금해지네요. 우리 삶에서 가장 빛나는 별은 무엇일까요? 어쩌면 그 별은 우리가 밤하늘에서 찾아 헤매는 거대한 별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때로는 사랑하는 사람의 미소, 따뜻한 위로의 한마디, 혹은 어린 시절의 소중한 기억이 가장 빛나는 별이 될 수 있겠죠. 밤이 깊어질수록 별은 더 선명해진다고 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숨겨진 그 별도, 지금쯤이면 더욱 빛나고 있을 겁니다.”
할머니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마음속에 숨겨진 별.’ 그렇다, 자신에게도 그런 별이 있었다. 눈으로 볼 수는 없어도, 결코 잊을 수 없는 별. 그 별을 다시 한 번 보고 싶었다. 흐릿하게라도, 그저 한 번이라도.
마지막 시도
할머니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왠지 모를 강한 이끌림에 이끌려 거실 한편으로 향했다. 망원경을 덮고 있던 검은 천을 걷어내자,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구식 망원경이 모습을 드러냈다. 먼지가 뿌옇게 앉아 있었지만, 할머니의 손길은 망원경의 차가운 금속을 조심스럽게 쓸었다.
“미안하다… 너무 오랫동안 방치했지.”
창가로 망원경을 옮기는 일은 생각보다 힘들었다. 삐걱거리는 관절을 움직여 삼각대를 펼치고, 무거운 경통을 들어 올렸다. 땀방울이 이마에 송골송골 맺혔지만, 할머니는 멈추지 않았다. 라디오에서는 여전히 김지훈 DJ의 나긋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는 지금 막, 오리온자리에 대한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할머니는 망원경의 접안렌즈에 눈을 가져다 댔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망원경의 감촉, 차가운 금속과 낡은 고무의 냄새.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초점 조절기를 돌렸다. 흐릿한 시야는 망원경을 통해서도 별을 선명하게 보여주지 못했다. 보였다가 사라지는 뿌연 점들. 저것이 별일까? 아니면 그저 먼지일까?
답답함에 할머니는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노력해도, 그 옛날의 찬란한 별들은 눈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내렸다. 남편과의 추억, 함께 나누었던 꿈들, 그리고 이제 홀로 남겨진 자신의 초라한 현실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그때, 라디오에서 김지훈 DJ가 마지막 곡을 소개했다.
“오늘 밤의 마지막 곡은 이소라 씨의 ‘별’입니다. 눈으로 보이지 않아도, 언제나 그 자리에서 우리를 비춰주는 별처럼, 여러분의 마음속에도 영원히 빛나는 무언가가 있기를 바라며… 저는 다음 주 이 시간, 다시 별이 빛나는 밤의 라디오와 함께 찾아오겠습니다. 안녕히 주무세요.”
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별’이라는 제목의 노래는 할머니의 심장을 조용히 어루만졌다. 할머니는 다시 접안렌즈에 눈을 댔다. 여전히 흐릿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눈앞의 흐릿한 점들이 아닌, 마음속의 별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남편의 다정한 미소. 언덕 위에서 함께 바라보던 밤하늘의 은하수. 손을 잡고 “저건 우리의 별”이라고 속삭이던 그의 목소리. 오리온의 삼태성, 그리고 그 아래에서 꿈을 꾸던 두 젊은이의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눈은 흐렸지만, 마음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 선명하게 과거를 비추고 있었다.
할머니는 더 이상 슬프지 않았다. 보이지 않아도 괜찮았다. 중요한 것은 그 별들이 여전히 자신의 마음속에, 자신의 영혼 속에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남편은 비록 곁에 없지만, 그와의 사랑은 저 별들처럼 영원히 빛나고 있었다.
할머니는 망원경에서 눈을 떼고 창밖의 흐린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희미한 몇 개의 별들. 하지만 이제 그 별들은 더 이상 할머니에게 외로움을 상징하지 않았다. 그것은 연결이었다. 자신과 남편을, 과거와 현재를, 그리고 이 밤을 듣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이어주는 보이지 않는 끈이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가 끝없이 밤을 감쌌다. 정아 할머니는 의자에 기대어 앉았다. 흐릿한 시야 속에서도, 그녀의 마음속 별들은 그 어느 때보다 밝게 빛나고 있었다. 어쩌면 가장 아름다운 별은, 우리의 눈이 아닌 마음으로 보는 것인지도 모른다. 오늘 밤, 별이 빛나는 밤의 라디오는 정아 할머니의 마음속에 꺼지지 않는 작은 우주를 선물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