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이 빛나는 밤의 라디오 – 제796화

별이 쏟아지던 약속

고요한 밤이었다. 스튜디오 창밖으로는 서울의 불빛이 아득하게 펼쳐져 있었지만, 유리 너머의 밤하늘은 짙은 남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수많은 이야기와 감정들이 실린 전파는 이 도시의 빛을 넘어, 보이지 않는 곳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마이크 앞에 앉은 지훈은 익숙한 미소를 지으며 첫 곡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그의 손끝이 매끄러운 원고지를 스쳤다. 오늘 밤도, 별이 빛나는 밤의 라디오는 어김없이 시작되었다.

“안녕하세요, 별밤 가족 여러분. 저는 깊은 밤하늘의 길잡이, DJ 지훈입니다.”

나지막하지만 따뜻한 그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갔다. 그의 목소리에는 796회라는 긴 시간 동안 쌓아온 위로와 공감의 역사가 담겨 있었다.

“오늘 밤, 여러분의 하늘에는 어떤 별들이 떠 있나요? 어떤 별은 찬란하게 빛나고, 또 어떤 별은 아련한 추억의 빛을 띠고 있겠죠. 저는 가끔 생각합니다. 이 넓고 넓은 우주 어딘가에 우리의 약속이 별처럼 박혀 있지는 않을까 하고요. 오늘, 한 통의 편지가 저에게 바로 그런 질문을 던져주었습니다.”

지훈은 눈을 감았다 뜨며, 사연이 담긴 봉투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수아님께서 보내주신 사연입니다. 익명으로 부탁하셨지만, 저는 오늘 이 사연을 통해, 잊혀지지 않는 어떤 약속의 별자리를 함께 더듬어보고 싶습니다.”

그때 그 겨울의 별자리

지훈은 조심스럽게 편지를 펼쳐 읽기 시작했다. 수아님의 글씨체는 단정하면서도 어딘가 아련한 떨림이 느껴졌다.

“지훈 DJ님, 안녕하세요. 저는 이 라디오를 십 년 넘게 들어온 오랜 청취자입니다. 한 번도 사연을 보낸 적은 없었지만, 지난주 이 방송에서 흘러나온 그 노래를 듣고, 결국 펜을 들었습니다. 제 이야기를 들어주실 수 있을까요.”

지훈은 숨을 고르고 다음 문단을 읽었다.

“저는 어릴 적, 재현이라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옆집에 살던 저희는 모든 것을 공유하는 가장 소중한 존재였죠. 특히 겨울밤, 저희는 늘 뒷산 언덕에 올라가 별을 보곤 했습니다. 그때는 도시의 불빛이 지금처럼 밝지 않아서, 정말 하늘에 보석이라도 뿌려놓은 듯 별들이 쏟아져 내렸어요.”

“어느 추운 겨울밤, 유난히 오리온자리가 선명했던 날이었어요. 재현이는 제게 농담처럼 말했습니다. ‘수아야, 우리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도 이 별들을 기억하자. 만약 우리가 아주아주 멀리 떨어지게 되면, 이 별밤 라디오에서 우리가 제일 좋아했던 그 노래가 나오면, 다시 여기, 이 오리온자리 아래에서 만나자.’ 그때 저는 초등학생이었지만, 그 약속이 제 마음속에 별똥별처럼 깊이 박혔습니다.”

지훈은 잠시 읽기를 멈추고 창밖의 어둠을 응시했다. 어린아이들의 순수한 약속이 때로는 가장 강력한 인연의 끈이 된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약속을 지킬 기회는 쉽게 오지 않았습니다. 재현이네 가족은 이듬해 갑자기 먼 나라로 이민을 가게 되었고, 연락처도 주소도 제대로 주고받지 못한 채 그렇게 헤어졌습니다. 너무 어렸던 저희는 이별의 무게를 알지 못했지만, 다시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감만은 어렴풋이 느꼈던 것 같습니다. 그 후로 저는 매일 밤 이 라디오를 들었습니다. 재현이와 제가 맹세했던 그 노래가 언젠가 나올까 하고요. 그 노래는 이선희 님의 ‘아름다운 강산’이었습니다.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저희가 왠지 모르게 끌렸던 명곡이었죠.”

밤하늘 아래의 기다림

지훈의 미간에 잔잔한 주름이 잡혔다. 그는 가슴 한편이 아릿해지는 것을 느꼈다.

“시간은 흘렀고, 저는 어느덧 서른을 넘긴 직장인이 되었습니다. 이 라디오는 제 일상의 일부가 되었고, 매일 밤 들으며 위로를 얻었습니다. 하지만 그 노래는,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사연과 신청곡 속에서도 ‘아름다운 강산’은 유독 저를 피해 가는 것 같았죠. 솔직히 말하면, 재현이와의 약속은 제 마음속 저편에 묻혀 희미한 추억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냥 어린 시절의 풋풋한 기억이었지’ 하고 스스로를 달래면서요.”

“그런데 지난주, 거짓말처럼 그 노래가 흘러나왔습니다. 한 청취자분이 보내주신 사연과 함께, DJ님의 목소리로 ‘아름다운 강산’이 소개되는 순간, 저는 숨을 쉴 수가 없었습니다. 퇴근길 차 안에서 라디오를 듣던 저는, 급히 차를 갓길에 세우고 한참을 울었습니다. 잊었다고 생각했던 재현이와의 약속, 그 겨울밤의 오리온자리, 그리고 수많은 별들이 제 눈앞에 다시 생생하게 떠올랐습니다.”

스튜디오 안에는 잠시 정적이 흘렀다. 지훈은 마이크를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수아님, 얼마나 긴 시간 동안 품어왔던 약속이었을까요. 어쩌면 그 노래가 나오지 않아서 다행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때는 그 약속을 다시 마주할 준비가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요. 하지만 이제, 당신의 별자리가 다시 선명해졌습니다.”

“그날 밤, 수아님은 혹시 재현이도 그 노래를 들었을까 궁금했습니다. 그도 여전히 이 라디오를 듣고 있을까. 아니, 어쩌면 그 약속 자체를 잊었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수아님은 더 이상 재현이를 찾으려 하지 않는다고 적어주셨습니다. 그저, 이 라디오를 통해 그 기억이 다시 되살아났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하셨습니다.”

지훈은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저는, 수아님의 이 용기 있는 고백이, 어쩌면 또 다른 별똥별이 될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우연이라 부르기에는 너무나 필연적인 순간들이 우리 삶에는 존재하니까요. 이제, 수아님과 재현이의 약속을 기억하며, 그리고 이 밤하늘 어딘가에 각자의 별자리를 새기고 있을 모든 분들을 위해, 이 노래를 바칩니다. 이선희 님의 ‘아름다운 강산’.”

음악이 흐르기 시작했다. 웅장하면서도 서정적인 멜로디가 스튜디오를 가득 채웠다. 지훈은 눈을 감고 노래를 들었다. 그의 마음속에도 잊고 있었던, 혹은 잊혀졌다고 생각했던 수많은 약속과 인연들이 별처럼 떠올랐다. 이 노래가 수아에게 준 감동처럼, 이 밤에도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희망의 메시지가 될 수 있을 터였다.

별들이 전하는 속삭임

노래가 끝나고, 스튜디오에는 여운이 짙게 깔렸다. 지훈은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그의 목소리는 아까보다 조금 더 깊어진 것 같았다.

“네, 이선희 님의 ‘아름다운 강산’ 들으셨습니다. 수아님, 그리고 이 노래를 들으며 잠시 어린 시절의 추억에 잠겼을 모든 분들께, 위로와 감동이 가득한 밤이기를 바랍니다.”

“어떤 약속은 영원히 지켜지지 않을지 모릅니다. 어떤 인연은 다시 닿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기억 속에, 그리고 저 밤하늘의 별들 속에 새겨진 그 마음만은 영원히 빛날 것입니다. 그리고 가끔은, 이렇게 라디오를 타고 전해지는 작은 속삭임이, 잊혀졌던 별들을 다시 불러내기도 하죠.”

지훈은 잠시 말을 멈췄다. 그의 손은 무심결에 스튜디오 테이블 위에 놓인 다른 봉투 하나를 만졌다. 방금 전, 노래가 나오는 동안 긴급하게 전달된 것이었다. 아직 뜯어보지 못한 봉투였다.

“오늘 밤, 누군가에게는 이 노래가 단순히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데 그치지 않았기를 바랍니다. 어쩌면 그 기억을 넘어, 새로운 인연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을 수도 있으리라고 저는 조심스럽게 기대해봅니다.”

그는 뜯어보지 않은 봉투를 잠시 응시했다. 봉투에는 급히 쓰인 듯한 글씨로 ‘긴급 사연’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리고 그의 시선이 문득 봉투 하단의 발신인 주소로 향했다. 그 주소는 이 라디오 방송국에서 꽤 먼, 오래된 동네의 이름이었다. 그리고 주소 옆에 작게 쓰인 이름은… ‘재현’.

지훈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고 봉투를 다시 내려놓았다. 그의 눈빛은 짙은 밤하늘처럼 깊고, 수많은 별들의 비밀을 간직한 듯 빛나고 있었다.

“별이 빛나는 밤의 라디오, 오늘은 여기서 마무리할 시간입니다. 저는 DJ 지훈이었고요. 다음 주에도, 이 별밤 아래에서 다시 만나요.”

방송이 끝나고, 지훈은 마이크가 꺼진 것을 확인하고 천천히 봉투를 들었다. 그의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과연 이 봉투 안에는 어떤 새로운 별자리가 담겨 있을까. 그는 조심스럽게 봉투의 봉인을 뜯었다. 밤은 깊어지고, 별들은 여전히 말없이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