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방은 늘 그랬듯 시간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창밖으로는 늦은 가을비가 가늘게 내리며, 낡은 창틀에 작은 물방울들을 아롱지게 만들었다. 지은은 할머니의 낡은 일기장을 무릎 위에 올려놓은 채, 조심스럽게 다음 장을 넘겼다. 이 작은 노트가 품고 있는 이야기는, 할머니의 살아온 세월만큼이나 깊고 넓어서, 읽을 때마다 새로운 파문이 지은의 마음에 일렁였다.
오늘은 유독 두꺼운 표지가 닳아 너덜해진 부분에 손이 닿았다. 1957년의 기록. 전쟁의 상흔이 채 아물기도 전, 모두가 고통 속에 허우적대던 그 시절의 기록이었다. 할머니, 현주(賢珠)의 글씨는 그때나 지금이나 단정했지만, 그 필체 속에는 설명할 수 없는 불안과 절박함이 스며 있었다.
1957년 1월 12일. 눈보라가 치던 밤.
“세상은 지옥 같았다. 매일 밤 꿈속에서도 굶주림과 추위가 나를 덮쳤다. 정화는 젖먹이 아기였고, 나는 내 한 몸 건사하기도 버거웠다. 그날 밤, 대문 앞에 버려진 바구니를 발견했을 때,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차가운 눈발 속에서 작은 생명이 희미하게 울고 있었다. 태어난 지 며칠이나 되었을까. 이마에는 파랗게 멍이 들어 있었고, 솜이불에 싸인 채 버려진 아기는 마치 눈 속의 꽃봉오리 같았다.”
지은의 손끝이 일기장 위에서 멈췄다. ‘또 다른 아기’라니. 할머니는 이미 어린 정화(지은의 어머니)를 홀로 키우고 있었다. 그 힘겨운 시절에, 또 다른 생명을 받아들였다는 건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이었다.
“밤새도록 고민했다. 외면하는 것이 마땅하다 여겼다. 나조차도 다음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였다. 그러나 그 작은 숨소리, 떨리는 몸짓이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결국 나는 아기를 품에 안았다. 조용히,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따뜻한 아랫목에 눕히고, 끓여놓은 미음을 식혀 먹였다. 작은 아기는 쌔근거리는 숨소리를 내며 내 곁에서 잠들었다. 나는 그 아기에게 ‘유진(宥眞)’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너그러울 유(宥), 참 진(眞). 부디 너그러운 마음으로 진실된 삶을 살아가라는 염원을 담았다.”
유진… 지은은 그 이름에서 왠지 모를 익숙함을 느꼈다. 어렴풋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얼굴들이 있었다. 혹시… 설마…?
“정화는 아직 어려 유진의 존재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유진을 마치 멀리서 온 손님처럼, 잠시 맡아주는 아이처럼 보이려 애썼다. 그러나 매일 밤, 두 아이가 내 옆에서 잠들면, 나는 죄책감과 동시에 말로 다 할 수 없는 충만함을 느꼈다. 한 아이를 더 키운다는 것은 지옥 같은 현실을 더욱 혹독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끼니는 더 줄었고, 옷가지 한 벌도 아껴 입어야 했다. 하지만 나는 후회하지 않았다. 나의 품 안에서 유진은 점차 생기를 되찾아갔다. 그 작은 미소 한 번에 나의 모든 고통이 눈 녹듯 사라지는 기적을 맛보았다.”
이어지는 기록들은 유진이 조금씩 자라나는 과정과, 현주 할머니가 그 사실을 숨기기 위해 얼마나 필사적으로 노력했는지를 보여주었다. 동네 사람들의 시선, 혹시라도 들킬까 노심초사하던 밤들, 그리고 유진이 자라면서 겪었던 작은 오해들까지. 할머니는 그 모든 것을 혼자 감당했다. 왜? 왜 그렇게까지 해야 했을까?
일기장의 페이지를 넘기자, 오래된 빛바랜 사진 한 장이 조심스럽게 끼워져 있었다. 사진 속에는 앳된 모습의 현주 할머니와 어린 정화, 그리고 그 옆에 활짝 웃고 있는 또 다른 여자아이가 있었다. 똘망똘망한 눈망울, 곱게 땋아 내린 머리칼. 그 아이는 분명 현주 할머니의 친딸처럼 보였다.
지은의 심장이 격렬하게 뛰기 시작했다. 사진 속 아이의 얼굴은, 그녀가 늘 보아왔던 한 사람의 얼굴과 소름 끼치도록 닮아 있었다. 바로, 지은의 작은할머니, 현주 할머니의 여동생이라고만 알고 있던 ‘현아(賢雅)’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현아 작은할머니는 늘 현주 할머니보다 열 살 가까이 어리다고 했었다. 그리고 현아 작은할머니의 이름은… ‘유진’이 아니었다. 대체 무엇이 진실이란 말인가?
“유진이 일곱 살이 되던 해, 나는 더 이상 숨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동네 사람들의 수군거림, 그리고 유진을 향한 의심의 시선들이 나를 짓눌렀다. 정화 역시 유진을 친자매처럼 따랐지만, 가끔씩 터져 나오는 질문에 나는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멀리 떨어져 살던 동생 부부가 아이를 잃고 슬픔에 잠겨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며칠 밤을 잠 못 이루며 고뇌했다. 그리고 결국, 유진을 동생 부부에게 보내기로 결심했다. 그들이 유진을 입양하고, 친딸처럼 키워준다면… 유진은 더 이상 숨어 살지 않아도 될 터였다. 더 풍족하고 안전한 환경에서, 세상의 편견 없이 자랄 수 있을 터였다. 나는 동생에게 간곡히 부탁했고, 유진의 이름은 현아(賢雅)로 바뀌었다. 현명하고 아름다운 아이가 되라는 뜻으로.”
지은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작은할머니 현아가 사실은 현주 할머니가 몰래 키웠던 입양아 유진이었다니!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숨긴 채, 평생을 현주 할머니의 친동생으로 살아왔다니! 지은은 어릴 적 현아 작은할머니가 현주 할머니를 향해 유독 깊은 애착을 보였던 이유, 현주 할머니가 현아 작은할머니에게 늘 말없는 연민과 동시에 무언가 미안한 듯한 표정을 지었던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가슴이 먹먹해졌다. 한 여인의 희생, 한 평생을 짊어진 비밀의 무게. 할머니는 그 모든 고통을 혼자 감내하며, 두 아이를 키워냈던 것이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가 그러하듯, 할머니는 자신의 존재를 희생해서라도 아이들을 지키려 했다. 지은은 떨리는 손으로 일기장의 마지막 줄을 읽어 내려갔다.
“유진을 떠나보내던 날, 나는 차마 뒤돌아보지 못했다. 그 아이의 작은 손이 내 치마폭을 붙잡으려 했지만, 나는 그 손을 놓아야만 했다. 나의 욕심 때문에 유진의 미래를 망칠 수는 없었다. 그날 밤, 나는 온몸에 피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유진이 현아라는 이름으로 훌륭하게 자랐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나는 나의 선택이 옳았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부디 유진아, 현아야. 너의 삶이 언제나 평안하고 행복하기를… 내가 너에게 해주지 못한 모든 것을, 너는 너의 삶에서 반드시 누리기를 바란다.”
창밖의 빗줄기가 더욱 거세졌다. 지은은 일기장을 꼭 끌어안았다. 그녀의 눈앞에는 이제껏 알지 못했던 할머니의 삶이, 거대한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할머니의 희생과 사랑이 만들어낸 비밀. 그 비밀은 단순한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현재의 지은에게, 가족이라는 이름의 의미를, 그리고 삶의 가장 깊은 곳에 숨겨진 진실들을 다시금 돌아보게 하는 거대한 울림이었다. 지은은 할머니의 낡은 일기장 속에서, 이제 막 새로운 진실의 문을 열었을 뿐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