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첫사랑을 찾는 탐정 – 제797화

강지혁은 낡은 종이 한 장을 손에 쥔 채 오래된 마을 버스에 몸을 실었다. 버스는 덜컹거리는 소리를 내며 익숙한 아스팔트를 벗어나 시골길로 접어들었다. 차창 밖 풍경은 파스텔 톤의 수채화처럼 흘러갔다. 멀리 보이는 야트막한 산들과 그 아래 옹기종기 모여 있는 슬레이트 지붕들. 그의 목적지는 미루골, 잊힌 시간의 조각들이 숨어 있을 법한 이름이었다.

며칠 전, 그는 폐기된 고물상에서 우연히 발견한 낡은 앨범 속에서 희미한 단서를 찾아냈다. 수십 년 전의 자선 바자회 사진. 빛바랜 흑백 사진 속에는 미소 짓는 여러 여인의 얼굴들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 무리 중 한 여인의 옆에, 흐릿하게 고개를 숙인 채 서 있는 한 사람이 있었다.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왠지 모르게 한은채를 연상시키는 체형과 분위기였다. 사진 뒷면에는 ‘미루골 이여사 자수점’이라는 메모와 몇몇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지혁은 그 ‘이여사’를 찾아 미루골까지 온 것이었다.

버스에서 내리자, 흙먼지 섞인 바람이 그를 맞았다. 읍내와는 확연히 다른 고요함이 그를 감쌌다. 지혁은 안내된 주소를 따라 좁은 골목길로 들어섰다. 담쟁이덩굴이 뒤덮인 낡은 담장들,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흘러나오는 작은 방앗간. 시간은 이곳에서 멈춘 듯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삐걱이는 나무 문패에 ‘이여사 자수점’이라고 쓰인 작은 가게를 발견했다. 문을 열자, 먼지 섞인 오래된 나무 냄새와 함께 알록달록한 실타래들, 수를 놓다 만 천 조각들이 눈에 들어왔다. 가게 안쪽 깊숙이, 허리가 굽은 노파 한 분이 돋보기를 쓴 채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었다. 머리는 희끗했지만, 손놀림은 여전히 섬세하고 능숙해 보였다.

“저… 이여사님 되시나요?” 지혁의 목소리가 낯선 공간에 울렸다.

노파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깊은 주름이 새겨진 얼굴이었지만, 눈빛만은 형형했다. “누구신가? 여긴 손님 안 온 지가 언제인데.”

지혁은 정중히 자신을 소개하고, 품에서 조심스럽게 사진을 꺼냈다. “혹시 이 사진 속 분들을 기억하시는지요?”

노파는 안경을 고쳐 쓰고 사진을 받아 들었다. 그녀의 눈이 가늘어지더니, 이내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아이고, 이게 몇십 년 전 사진이여. 바자회 때네. 그때는 다들 젊었지…” 그녀의 손가락이 사진 위를 더듬었다. “이건 김 씨네 둘째 딸, 이건 박 이장댁 마님… 어휴, 다들 이제는 세상에 없거나 늙었을 텐데.”

지혁은 초조하게 노파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혹시 이분… 기억나세요?” 그는 사진 속 은채와 비슷해 보이는, 고개를 숙인 여인을 가리켰다. “이름이… 수진이라고 적혀 있던데요.”

노파는 한참을 들여다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수진이… 수진이… 아! 그 봉사 왔던 젊은 아가씨 말인가? 얼굴이 희미해서 잘 안 보이네. 성은 생각이 안 나고, 이름은 수진이라고 불렀던 것 같아. 조용하고 착한 아가씨였지. 곱게 생긴 데다 손재주도 좋아서 바느질도 곧잘 도와주곤 했어.”

지혁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조용하고 착한 아가씨, 곱게 생기고 손재주가 좋았다…’ 마치 은채를 설명하는 듯했다. “그분 혹시… 어떤 특징 같은 게 있었나요? 예를 들어, 머리 스타일에 뭘 꽂았다든지…”

이여사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음… 글쎄. 딱히 특이한 건 없었는데… 아, 맞아! 그 아가씨가 항상 조그만 은색 나비 모양 머리핀을 꽂고 다녔어. 다른 아가씨들은 꽃이나 리본 핀을 했는데, 그 아가씨는 꼭 그 나비핀을 했지. 예뻤어, 참.”

은색 나비 머리핀. 지혁은 숨을 들이켰다. 은채가 어릴 적부터 가장 아끼던 머리핀이었다. 첫사랑을 잃고 난 후에도, 꿈속에서 그녀를 만날 때면 늘 그 나비핀을 꽂고 있었다. 그의 눈앞에 은채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드디어, 드디어 찾은 것인가.

“그럼 그 수진이라는 분… 혹시 어디로 갔는지 아세요? 연락처라도…” 지혁의 목소리가 갈급해졌다.

이여사의 표정이 아련해졌다. “글쎄. 그 아가씨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지.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 아무 말 없이. 그래서 모두들 안타까워했어. 다들 수진이가 어딘가에서 잘 살고 있기를 바랐지. 그런데…” 노파는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떨궜다.

“그런데요?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지혁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그런데 그 수진이라는 아가씨는… 왼손목에 흉터가 있었어. 어릴 적 사고로 생긴 거라고 했었지. 꽤 깊은 흉터였는데, 그 아가씨가 늘 팔찌로 가리고 다녔어.”

지혁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왼손목 흉터? 은채는 오른손잡이였고, 그녀의 손목에는 아무런 흉터도 없었다. 그는 수없이 그녀의 손을 잡았고, 그녀의 가는 손목을 기억하고 있었다. 절망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또다시, 이렇게 희망의 끈이 끊어지는가. 797번째 좌절인가.

그의 얼굴에 깊은 실망감이 서리는 것을 본 이여사가 그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아이고, 아저씨. 혹시 그 수진이라는 아가씨랑 아는 사이신가?”

지혁은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 첫사랑입니다. 어릴 적에 헤어진 후로… 계속 찾고 있습니다.”

이여사는 그의 눈을 들여다보더니, 갑자기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굳었던 표정을 풀었다. “아! 잠깐만. 수진이 아니라… 그 옆에 서 있던 그 아이. 이름이… 아, 가끔씩 봉사 활동을 왔던 그 친구. 은채…였나? 그 아이는 왼손목에 흉터 같은 건 없었고… 항상 오른손 약지에 작은 반지를 끼고 다녔어. 늘 그걸 돌리면서 생각에 잠기곤 했지.”

지혁의 심장이 다시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오른손 약지에 끼던 작은 반지. 은채와 자신이 함께 맞췄던, 보잘것없지만 소중했던 그 반지.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은채… 맞습니다! 한은채!”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이여사는 빙긋 웃었다. “아이고, 그랬지. 한은채. 그 아가씨는 여기 미루골 출신이 아니었어. 읍내에서 학교를 다녔다고 했나. 바자회 때도 친구 따라 잠깐 왔던 거고. 수진이랑은 친했지만, 수진이처럼 자주 오지는 않았지.” 그녀는 일어서더니, 가게 안쪽 깊숙한 서랍을 뒤적거렸다. “그러다가 몇 년 전에 우연히 여기 읍내에서 다시 마주쳤었지 뭐야. 결혼해서 고향으로 다시 내려왔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이렇게 얼굴을 보니 어찌나 반갑던지.”

이여사가 서랍 속에서 낡은 사진 한 장을 꺼내 내밀었다. 지혁은 떨리는 손으로 사진을 받아 들었다. 사진 속에는 이여사와 함께, 세월의 흔적이 엿보이지만 여전히 고운 미소를 짓고 있는 한 여인이 서 있었다. 얼굴 가득 번지는 익숙한 미소, 깊어진 눈매, 그리고 변함없이 선량한 눈빛. 한은채였다. 분명했다. 그녀의 오른손 약지에는 작은 반지가 빛나고 있었다.

“그때 찍은 사진인데, 그 아이가 준 거야. 읍내에서 작은 꽃집을 한다고 했어. ‘은채꽃집’이라고. 남편이랑 아들 하나랑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하더구먼.”

은채꽃집. 읍내. 결혼. 아들. 한 번에 너무나 많은 정보가 쏟아져 들어왔다. 그의 잃어버린 사랑은 결혼했고, 아이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살아있었고, 이곳 미루골 읍내 어딘가에 있었다. 수십 년간의 방황이, 수백 번의 좌절이, 이 한 장의 사진과 ‘은채꽃집’이라는 세 글자로 보상을 받는 순간이었다.

지혁은 사진을 가슴에 품었다. 기쁨, 슬픔, 안도감, 그리고 알 수 없는 먹먹함이 뒤섞여 그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이제 그녀는 바로 코앞에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알 수 없는 두려움에 휩싸였다. 이토록 오랫동안 찾아 헤맨 그녀를, 과연 어떤 얼굴로 마주해야 할까. 그의 발걸음은 읍내를 향해 움직였다. 그의 긴 여정은 이제 새로운 시작점에 놓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