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잃어버린 시간 여행자 – 제801화

시간의 파편 지대. 그곳은 모든 시대의 조각들이 뒤섞여 예측 불가능한 형상으로 떠다니는 혼돈의 심장이었다. 푸른 하늘에는 18세기의 범선이 기울어진 채 정지해 있었고, 그 아래 흐르는 강물 위로는 미래 도시의 거대한 건축물 잔해가 그림자처럼 드리워져 있었다. 시간은 이곳에서 제멋대로 흐르거나 멈추었고, 때로는 되감기기도 했다. 세라는 익숙한 듯이, 그러나 늘 새로운 전율을 느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세라, 더 이상은….”

카일의 목소리가 불안하게 떨렸다. 그의 등 뒤에는 고대 로마 병사의 투구가 얹힌 바위가, 다음 순간에는 21세기의 빛바랜 자판기가 되어 버리는 기이한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시간의 왜곡이 극심해질수록 주변의 에너지 파동은 더욱 거칠어졌고, 그들의 시간 이동 장치 ‘크로노스텔라’도 삐걱거리는 경고음을 내고 있었다. 세라는 손을 뻗어 카일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녀의 표정은 차분했지만, 눈동자 속에는 800번이 넘는 시간의 고통을 견뎌낸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알아. 하지만 여기밖에 없어. 그들이 찾는 ‘핵’이 여기 가장 깊은 곳에 봉인되어 있다고 했어.”

그들이 찾는 ‘핵’은, 무분별한 시간 조작으로 인해 벌어진 시공간 균열을 되돌릴 수 있는 유일한 열쇠였다. 그리고 그 핵은, 세라가 잃어버린 기억의 파편들과 깊이 연관되어 있었다.

그때, 저 멀리 시간의 안개 속에서 섬광이 번쩍였다. ‘그들’이었다. 시간의 흐름을 장악하고 과거와 미래를 자신들의 입맛대로 바꾸려는 자들. 세라의 잃어버린 기억 속에 그들이 자신에게 속삭이던 목소리가 불현듯 스쳐 지나갔다. ‘넌 우리의 가장 위대한 피조물이었어, 세라. 왜 배신했지?’

머리가 깨질 듯 아파왔다. 눈앞이 흐릿해지며 과거의 한 조각이 파편처럼 튀어 올랐다. 차가운 강철 벽으로 둘러싸인 연구실, 수많은 데이터가 흐르는 투명한 화면들,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던 한 남자의 절망적인 눈빛…. 그 남자의 얼굴은 기억 속에서 모자이크처럼 깨져 보이지 않았다.

“세라!”

카일의 다급한 외침에 정신을 차렸다. 그들의 공격이 시작된 것이었다. 붉은색 에너지 파동이 찢어진 시공간을 가르며 날아왔다. 카일은 몸을 던져 세라를 밀쳤고, 파동은 그들이 방금 서 있던 자리를 거대한 구멍으로 만들었다. 구멍 너머로는 먼 미래의 황량한 폐허가 잠시 모습을 드러냈다가 다시 사라졌다.

“서두르자, 세라. 엘리사가 좌표를 찾고 있어. 이 지옥 같은 곳에서 벗어나야 해.”

숨을 헐떡이며 카일이 말했다. 엘리사는 그들의 함선에 남아 크로노스텔라의 안전한 탈출 경로를 계산하고 있었다. 시간의 파편 지대는 물질계의 규칙이 통하지 않는 곳이라, 이동 장치 없이는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었다.

세라는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다. 지형은 계속해서 변했다. 어떤 순간에는 중세 유럽의 성벽이 앞을 가로막다가, 다음 순간에는 심해 해구의 풍경이 발아래 펼쳐졌다. 그녀는 잃어버린 기억 속에서 본 듯한, 그러나 한 번도 실제로 가본 적 없는 풍경들을 넘어서고 있었다. 이곳은 마치 그녀의 혼란스러운 내면을 형상화한 듯했다.

그들은 마침내 시간의 파편 지대 가장 깊은 곳, 모든 시간의 조각들이 마치 거대한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리는 곳에 도달했다. 그 중심에는 빛을 잃은 거대한 수정체가 박혀 있었다. 그것이 바로 ‘핵’이었다. 모든 시공간의 에너지를 담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봉인되어 잠든 존재. 하지만 그 핵을 보호하듯, 섬뜩한 기운을 내뿜는 그림자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역시… 쉬운 길은 없군.”

카일이 주먹을 꽉 쥐었다. 그들의 앞을 가로막는 것은 ‘시간 관리국’의 정예 요원들이었다. 그들의 갑옷은 과거와 미래의 기술이 뒤섞여 기묘한 형태로 번쩍였고, 손에 든 무기에서는 시공간을 일그러뜨리는 에너지 방출음이 들려왔다.

“세라, 마침내 여기까지 오는군요. 당신이 잃어버린 기억 속의 죄를 마주할 시간이 된 것입니다.”

그들의 선봉에 선, 얼음처럼 차가운 목소리의 여자가 입을 열었다. 그녀의 가면 뒤로 보이는 눈동자는 세라에게 묘한 친근감과 함께 깊은 공포를 안겨주었다. ‘이 여자도 내 기억 속에 있었던가?’

“무슨 소리야?” 세라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난… 난 아무것도 기억 못 해.”

“기억 못 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하기를 거부하는 것이겠지. 당신은 이 핵을 봉인하려 했어. 하지만 그건 동시에 우리의 미래를 파괴하는 행위였다.”

여자의 말과 함께, 그녀의 손에서 뿜어져 나온 시공간 왜곡 에너지가 세라를 향해 덮쳐왔다. 카일이 재빨리 세라를 보호하며 방어막을 쳤지만, 그 충격은 너무나 강력했다. 세라의 머릿속에 또 다른 파편이 터져 나왔다.

‘핵을 봉인해야만 해. 이대로 두면 모든 시간은 사라질 거야….’

그 목소리는… 자신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동시에, 봉인하려던 자신의 손이 피로 물들어 있었다. 누군가를 희생시킨 기억…. 거대한 죄책감이 그녀의 심장을 짓눌렀다. 그녀는 과연 무엇을 한 것일까? 핵을 봉인하는 것이 왜 죄가 되는가? 아니, 애초에 그녀는 누구인가?

세라는 비틀거리며 핵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차가운 수정체에서 미약하게나마 울려 퍼지는 에너지가 그녀의 잃어버린 기억들을 다시금 뒤흔들었다. 그때, 엘리사의 목소리가 통신기를 통해 울려 퍼졌다.

“세라! 카일! 위험해! 핵 주변의 시공간 에너지가 불안정해지고 있어. 핵을 건드리면… 전체 시공간이 붕괴될지도 몰라!”

하지만 이미 늦었다. 세라의 손이 핵에 닿는 순간, 거대한 빛이 폭발했다. 주변의 모든 시간의 파편들이 산산조각 나며 허공으로 흩어졌다. 시간 관리국의 요원들도 비명을 지르며 튕겨 나갔다. 세라의 몸이 빛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 속에서 그녀는 마침내 자신의 모든 잃어버린 기억들을 마주했다. 광활한 우주를 유영하는 자신의 모습, 시간의 흐름을 조작하는 자신의 손길, 그리고… 한 남자와의 약속. 그리고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자신이 감당해야 했던 거대한 희생… 그리고 죄책감.

‘내가… 내가 모든 것을 망쳤어….’

그녀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빛이 서서히 잦아들자, 세라는 핵을 든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핵은 다시금 빛을 되찾았지만, 그녀의 표정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그녀는 모든 것을 기억해냈다. 자신이 왜 기억을 잃었는지, 왜 핵을 봉인하려 했는지, 그리고 왜 시간 관리국이 자신을 쫓고 있는지까지.

“세라… 괜찮아?” 카일이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다가섰다.

세라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빛은 더 이상 혼란스럽지 않았다. 비록 슬픔과 후회로 가득했지만, 동시에 굳건한 결의가 빛나고 있었다. 그녀는 핵을 품에 안고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봉인되어 있던 핵의 진정한 힘이 그녀의 몸속으로 흘러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의 주변을 감싸던 시공간의 왜곡이 잠시 멈추는 듯했다.

“이건… 내 것이야.”

그녀의 목소리는 나지막했지만, 그 안에는 801화에 걸쳐 쌓아온 모든 고통과 비밀, 그리고 결연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핵을 든 그녀의 모습은 마치 고대 시간의 여신처럼 위대하고도 비극적이었다. 이제 모든 기억이 돌아왔지만, 그녀의 앞에 놓인 길은 더욱 험난해 보였다. 그녀는 시간의 균열을 바로잡아야 할 숙명을 다시금 짊어지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 길의 끝에는, 그녀를 기다리는 거대한 대가와 피할 수 없는 희생이 있을 터였다.

시간의 파편 지대가 다시 요동치기 시작했다. 세라는 핵을 든 채 한 발짝 내디뎠다. 그녀의 새로운 여정은 이제 막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