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찾아온 길고양이와의 대화 – 제255화

창문 밖 세상은 고요했다. 바람 한 점 없는, 그러나 모든 것을 흔들고 지나간 뒤의 적막이 내려앉은 늦가을 밤이었다. 마당 한켠의 감나무에는 잎사귀 몇 개만이 간신히 매달려 있었고, 그마저도 이제 곧 차가운 땅으로 돌아갈 운명을 기다리는 듯 파르르 떨고 있었다. 나는 뜨거운 찻잔을 두 손으로 감싼 채, 유리창 너머 스며드는 냉기를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해마다 이맘때면 찾아오는 익숙한 감각. 계절의 순환은 늘 예측 가능했지만, 그 순환 속에서 변해가는 나의 모습은 언제나 낯설었다.

수많은 계절이 그렇게 흘러갔다. 이 작은 집에서 그림자와 함께 맞이했던 해묵은 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처음 그림자를 만났던 그날의 쨍한 햇살부터, 함께 눈을 맞았던 겨울밤의 포근함까지. 이젠 그 모든 기억들이 내 안에 녹아들어, 굳이 애쓰지 않아도 언제든 꺼내볼 수 있는 서랍 속 오래된 사진처럼 선명했다. 때로는 그 기억들이 너무나 선명해서, 내가 과연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것이 맞나 하는 착각에 빠지곤 했다. 시간의 강물은 한결같지만, 그 위를 떠내려가는 조각배는 늘 다른 풍경과 마주하는 법이다.

“그림자야.”

내가 나직이 부르자, 어둠 속 한 모퉁이에서 그림자 같은 형체가 스르르 나타났다. 검은 털은 밤의 장막에 완전히 동화되어, 언뜻 보면 아무것도 없는 듯 보였다. 하지만 나는 알았다. 저 작은 눈빛 속에 담긴 넉넉한 이해심을. 녀석은 늘 그랬듯 소리 없이 다가와, 내 무릎께에 제 몸을 기댔다. 따스하고 부드러운 온기가 차가워진 내 다리에 스며들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림자의 등을 쓸어주었다. 털끝 하나하나에 배어 있는 익숙한 감촉이 마음을 진정시켰다.

“오늘따라 유독 마음이 좀, 허전하다. 모든 것이 변해가는 것 같아서.”

내 말에 그림자는 그르렁거리며 답했다. 마치 ‘응, 알고 있어. 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도 있지’라고 말하는 듯한 낮고 진동하는 소리였다. 우리는 서로의 언어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오랜 시간 쌓아온 침묵의 대화 속에서 우리는 모든 것을 나누고 있었다. 언어의 장벽을 넘어선, 영혼과 영혼의 교감이었다.

“삶이란 게 참 이상하지 않니? 애써 잡으려 하면 할수록 더 빨리 달아나는 것 같다가도, 때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제풀에 지쳐 내 앞에 털썩 주저앉아 있잖아. 어릴 적엔 세상 모든 것이 영원할 줄 알았는데… 지나고 보니 모든 것이 한때일 뿐인 것 같아.”

그림자는 고개를 들어 내 눈을 응시했다. 밤의 어둠 속에서도 형형하게 빛나는 노란 눈동자는 마치 오래된 지혜를 품고 있는 듯했다. 그 눈빛은 내가 겪어온 모든 고뇌와 회한을 꿰뚫어 보는 것 같으면서도, 동시에 조건 없는 위로와 지지를 보내고 있었다. 그 고요한 시선 속에서 나는 나의 작은 고민들이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임을 깨닫곤 했다.

“너는…. 너는 어떠니, 그림자야? 너도 이 시간이 흘러가는 게 느껴지니? 언젠가 이 모든 순간이 과거가 될 것이라는 걸 알고 있니?”

내 질문에 그림자는 다시 고개를 내리고 내 손에 제 머리를 비볐다. 그 움직임은 마치 ‘나는 그저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할 뿐입니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래, 녀석은 늘 그랬다. 지나간 것에 연연하지 않고, 오지 않은 것에 불안해하지 않았다. 그저 따스한 햇볕 한 줌, 신선한 물 한 모금, 그리고 나라는 존재가 주는 작은 위안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존재. 어쩌면 그림자는 내게 삶의 가장 근원적인 진리를 매일 가르쳐주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가장 빛나는 순간은 언제나 ‘지금’이라고.

나는 다시 찻잔을 들었다. 이제는 미지근해진 차를 천천히 마셨다. 쓴맛과 단맛이 뒤섞인 오묘한 맛이 목을 타고 넘어갔다. 인생의 맛과도 같았다. 쌉쌀하면서도, 그 안에 숨겨진 달콤함을 발견하게 되는. 그 순간, 작은 깨달음이 내 안에 스며들었다. 이 허전함 또한 삶의 한 조각이라는 것을. 사라져가는 모든 것들 때문에 느끼는 이 감정이, 역설적으로 존재의 깊이를 더해준다는 것을.

문득, 나의 어릴 적 꿈이 떠올랐다.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을 글 속에 담아내고 싶다는 열망. 시간이 흐르면서 그 꿈은 점점 퇴색하고, 현실의 무게에 눌려 어딘가에 깊숙이 파묻혀 버린 줄 알았다. 하지만 그림자와 함께하는 이 시간 속에서, 나는 그 꿈의 작은 조각들을 다시금 발견하곤 했다. 녀석의 따스한 체온, 고요한 숨소리, 그리고 말없는 존재감은 내 안의 잠들어 있던 감수성을 깨우는 가장 강력한 자극제였다. 나는 다시 글을 쓰고 싶어졌다. 이 고요한 밤의 감정들을, 그림자의 깊은 눈빛을, 스러져가는 계절의 아름다움을.

“이 모든 것이 언젠가는 사라지겠지. 우리도, 이 집도, 이 밤도.”

내가 중얼거렸다. 어둠 속에서 감나무 잎이 하나 더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멀리서 들려오는 희미한 바람 소리가 창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사라진다고 해서 아무것도 아닌 게 되는 건 아니겠지. 우리의 기억, 우리의 감정, 그리고… 우리의 존재. 이 모든 것은 어떤 식으로든 계속 남아 있을 거야. 우리를 기억하는 누군가의 마음속에, 혹은 우리가 남긴 작은 흔적들 속에. 그렇지 않니, 그림자야?”

그림자는 내 질문에 꼬리를 한번 휘둘렀다. 마치 ‘물론입니다. 걱정 마세요. 우리가 함께한 시간은 사라지지 않습니다’라고 답하는 듯한 가볍고 명확한 움직임이었다. 그 순간, 내 안에 웅크려 있던 허전함이 조금은 가시는 것을 느꼈다. 그림자의 존재는 언제나 그랬다. 내가 길을 잃고 헤맬 때, 혹은 깊은 생각의 미로에 갇혔을 때, 녀석은 늘 한 줄기 빛처럼 다가와 나를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나는 그림자를 품에 안았다. 조심스럽게, 하지만 단단하게. 녀석의 털은 부드러웠고, 심장이 뛰는 미세한 떨림이 내 팔을 통해 전해졌다. 이 작은 생명체가 내 삶에 얼마나 큰 위안과 의미를 주었는지 헤아릴 수 없었다. 어쩌면 내가 그림자를 발견한 것이 아니라, 그림자가 나를 발견하고 내 삶에 들어와 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창밖에는 이제 정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모든 것이 잠든 시간. 저 멀리 차가운 달빛이 마당 위로 희미하게 쏟아져 내렸다. 하지만 내 옆에는 따뜻한 그림자가 있었다. 녀석의 눈빛 속에는 영원히 변치 않을 것 같은 고요한 세상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 세상 속에, 나 또한 고요히 자리 잡고 있었다. 또 다른 계절이 오고, 또 다른 하루가 시작될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시간 속에서, 우리는 이 고요한 대화를 이어갈 것이다. 영원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