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눈꽃이 내리던 날의 약속 – 제802화

강하윤은 창가에 서서 유리창을 두드리는 겨울비 같은 진눈깨비를 바라보았다. 희뿌연 하늘에서 녹다 만 눈송이들이 힘없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아직 한낮인데도 세상은 온통 잿빛으로 물든 듯했다. 저마다 바쁜 걸음으로 퇴근을 서두르는 사람들 사이를 하윤은 아무런 감흥 없이 응시했다. 무언가 뜨거운 것이, 목구멍을 턱 막아 숨조차 쉴 수 없게 만드는 뜨거운 덩어리가 그녀의 가슴 언저리에 묵직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하윤아, 이제 정말… 더 이상은 미룰 수 없어.”

등 뒤에서 들려오는 윤지혁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훨씬 낮고 무거웠다. 그가 건넨 오래된 나무 상자 속에는 한때 서진이 가장 소중히 여기던 물건들이 담겨 있었다. 낡은 손수건, 빛바랜 사진 몇 장, 그리고 제일 아래에는… 얇은 가죽 표지의 일기장이 조심스럽게 놓여 있었다.

하윤은 지혁에게서 상자를 건네받았다. 차가운 나무 상자의 촉감이 그녀의 손끝을 파고들었다. 마치 수십 년 전, 그 약속을 맹세하던 날의 얼음장 같은 추위가 되살아나는 듯했다. 겨울 눈꽃이 흩날리던 작은 언덕 위. 열일곱의 서진과 열여섯의 하윤은 서로에게 기댔다.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과 희망이 뒤섞인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어떤 시련이 닥쳐도 결코 서로의 손을 놓지 않겠다는 맹세를 했다.

“기억나, 서진아? 눈꽃이 녹으면 우리는 더 단단해질 거야. 어떤 겨울도, 우리를 갈라놓을 순 없어.”

서진의 말은 메아리처럼 하윤의 귓가에 맴돌았다. 그리고 그 말은 거짓말처럼, 잔인한 운명의 예언처럼 현실이 되었다. 그 겨울이 지나고 몇 해가 더 지나기 전, 서진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모든 이가 그를 잊으라 했고, 모든 증거는 그가 존재하지 않는 이가 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하윤은 잊을 수 없었다. 그날의 약속, 그리고 서진의 눈빛 속에 담겨 있던 무한한 믿음과 사랑을.

하윤은 일기장을 집어 들었다. 그녀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서진이 사라진 후, 지혁은 수없이 많은 것을 하윤에게 가져다주었지만, 그 어떤 것도 서진의 흔적을 온전히 설명해주지 못했다. 그러나 이 일기장은 달랐다. 지혁은 서진의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유품을 정리하다가 서진의 방 벽장 깊숙한 곳에서 발견했다고 했다. 너무나 오랫동안 봉인되어 있던 시간의 기록. 지혁의 말에 따르면, 일기장에는 서진이 하윤에게 숨겼던, 아니, 하윤을 위해 숨겨야 했던 진실이 담겨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부디… 네게 상처가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야.”

지혁의 걱정 어린 목소리에 하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이제 더 이상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너무 많은 눈물을 흘려버려, 이제는 메마른 강바닥처럼 감정이 말라버린 줄 알았다. 하지만 일기장을 펼치는 순간, 그녀의 심장은 마치 깨어난 화산처럼 격렬하게 요동쳤다.

첫 페이지에는 서진의 단정한 글씨로 날짜가 적혀 있었다. ’20XX년 1월 12일. 눈꽃이 내리던 날.’ 그리고 그 아래에 짧은 문장이 이어졌다. “하윤이에게 약속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지켜낼 거라고. 이 약속은 내 삶의 전부가 될 것이다.”

하윤의 눈은 빠르게 페이지를 훑어 내려갔다. 서진의 일상은 그녀가 알고 있던 그대로였다. 학교, 친구들, 미래에 대한 막연한 꿈, 그리고 하윤에 대한 깊은 사랑. 그러다 어느 순간, 일기장의 내용이 미묘하게 바뀌기 시작했다. 외부의 압력, 보이지 않는 위협에 대한 암시, 그리고 하윤을 지키기 위한 고뇌가 글줄마다 배어 있었다.

“오늘, 그들이 찾아왔다. 더 이상 하윤이 곁에 머물 수 없을 것 같다. 그녀를 위험에 빠뜨릴 수는 없어. 하지만 어떻게… 어떻게 그녀를 떠날 수 있을까. 내 심장이 갈가리 찢어지는 것 같다. 약속은… 우리의 약속은 어떻게 되는 거지?”

페이지마다 서진의 번뇌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하윤은 숨을 멈췄다. 그녀는 서진이 단순히 사라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가 어딘가에서 누군가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쳤다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했지만, 이렇게 생생한 기록으로 접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글자 한 자 한 자가 마치 서진의 목소리처럼 그녀의 귓가에 울렸다.

“그들은 내가 가진 ‘재능’을 원한다. 내가 하윤이에게 말할 수 없는 비밀. 내가 이 재능을 쓰지 않으면 하윤이를 해치겠다고 협박한다. 어떻게 해야 할까? 내가 사라지는 것이 그녀를 지키는 유일한 방법인가?”

하윤의 손에서 일기장이 미끄러질 뻔했다. ‘재능’이라니? 서진은 어떤 재능을 가지고 있었으며, 누가 그를 협박했던 것인가? 그녀는 서진의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그녀를 위해 너무나 많은 것을 숨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심장이 너무나 격렬하게 뛰어 심장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그리고 마지막 페이지. 지혁이 특별히 강조했던,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나타난 페이지. 다른 글씨체로 쓰여 있었다. 서진의 것은 아니었다.

“강하윤에게. 서진은 당신을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했습니다. 그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당신은 이 진실을 밝히고, 그가 원했던 세상의 빛을 찾아야 합니다. 그는 당신에게 보내는 마지막 증거를, 그가 가장 아끼던 눈꽃 모양 펜던트 안에 숨겨 두었습니다. 당신의 용기를 믿습니다. – S.”

‘S’라고? 대체 누구지? 하윤은 자신의 목에 걸린, 서진이 선물했던 눈꽃 모양 펜던트를 무심결에 움켜쥐었다. 십 년이 넘도록 단 한 번도 벗은 적 없는 펜던트. 그 안에 서진이 마지막 증거를 숨겨두었다고? 하윤은 서진의 일기장과 펜던트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억울함, 배신감, 그리고 이루 말할 수 없는 슬픔이 그녀를 덮쳤다. 서진은 왜 그녀에게 모든 것을 말하지 않았을까? 왜 그녀를 혼자 남겨두고 이렇게 끔찍한 비밀을 혼자 감당하게 했을까?

하지만 이내 그녀의 분노는 차가운 결의로 바뀌었다. 그가 남긴 흔적을 따라가야 했다. 그가 자신을 위해 감당했던 고통, 그가 지키려 했던 진실, 그 모든 것을 알아내야 했다. 그리고 그를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아니, 만날 수 없더라도, 그가 남긴 숙제를 완수해야 했다. 그것이 바로 ‘겨울 눈꽃이 내리던 날의 약속’을 지키는 유일한 길이었다.

창밖의 진눈깨비는 어느새 굵은 함박눈으로 바뀌어 세상을 하얗게 덮고 있었다. 첫눈치고는 너무나 성급하게 내리는 눈이었다. 하윤은 차가운 펜던트를 꽉 쥐었다. 그 안에서 잠들어 있을지 모르는 서진의 마지막 메시지를 찾아내야 했다. 이제 그녀의 고독한 싸움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할 것이었다. 그리고 그 시작은, 서진이 남긴 일기장과 눈꽃 펜던트 속에서였다.

하윤은 눈이 펑펑 쏟아지는 창밖을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 그곳에 서진의 모습이, 그의 따뜻한 미소가 어른거리는 듯했다. “두렵지 않아, 서진아. 네가 남긴 약속, 내가 꼭 지킬게.” 그녀의 입술에서 희미한 다짐이 흘러나왔다. 길고 긴 기다림의 끝에서, 마침내 진실의 문이 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