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밤, 유난히 도시의 소음이 멀게 느껴졌다. 창밖은 어둠에 잠겨 있었고, 내 방은 스탠드 하나에 의지한 채 고독한 섬처럼 떠 있었다.
내 마음도 그 섬과 다르지 않았다. 오래된 상처가 욱신거리며 다시 그 존재를 알렸다.
며칠 전 우연히 들었던 소식 때문이었다. 어린 시절, 가장 가까웠던 친구가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이야기.
나는 그 친구를 떠나보낸 후 단 한 번도 먼저 손 내밀지 못했다. 그때의 내가 너무도 어리고 미숙했기에, 그리고 이기적이었기에.
차가운 머그잔을 손에 쥔 채, 나는 흐릿한 유리창 너머 어둠을 응시했다. ‘만약 그때 내가 달랐다면….’
수많은 가정들이 머릿속을 맴돌았지만, 이미 지나간 시간은 돌이킬 수 없는 법. 그 무력감과 후회는 거대한 파도처럼 나를 덮쳤다.
바로 그때였다. 익숙한 움직임이 내 시야에 들어온 것은.
창틀에 스며들듯 자리 잡은 해란이. 녀석은 언제나처럼 소리 없이 나타났다.
해란의 눈동자는 어둠 속에서도 영롱하게 빛났다. 녀석은 창문을 넘어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내 표정을 살피듯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시선 속에는 늘 말로 다 할 수 없는 깊은 이해가 담겨 있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해란아… 내가 뭘 할 수 있었을까? 그때, 그리고 지금도.”
해란은 조용히 내 다리에 몸을 비볐다. 부드러운 털의 감촉이 차갑게 식었던 내 마음에 온기를 불어넣는 듯했다.
녀석은 한참을 그렇게 부비적거리다가, 이내 내 무릎 위로 뛰어올랐다.
그르릉거리는 낮은 울음소리가 고요한 방을 채웠다.
나는 해란의 등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녀석의 체온이 내 손바닥을 통해 전해져 왔다.
“그 친구를 다시 만날 용기가 없어. 내가 너무 겁쟁이 같아 보일까 봐.”
나는 속삭이듯 말했다. 해란은 내 눈을 지그시 바라봤다.
마치 ‘두려움은 자연스러운 거야. 하지만 그 두려움이 너를 멈추게 해서는 안 돼.’라고 말하는 듯했다.
이어진 해란의 행동은 나를 놀라게 했다.
녀석은 무릎에서 내려가더니, 방 한쪽 구석에 놓인 낡은 상자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 상자 안에는 내가 어린 시절 친구와 함께 만들었던, 잃어버린 줄 알았던 작은 나무 조각배가 들어있었다.
해란은 코로 조심스럽게 그 조각배를 밀어냈다.
나는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저 조각배는 우리 우정의 상징이었다. 함께 꿈을 싣고 바다로 보냈던.
오랜 시간 잊고 지냈던 조각배가, 지금 이 순간 해란의 발끝에서 다시 내게로 돌아오고 있었다.
해란은 조각배를 내 발치까지 밀어놓고는 다시 내 무릎 위로 뛰어올랐다.
그리고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 깊은 눈빛은 ‘봐, 모든 것이 사라진 건 아니야. 때로는 잠시 잊히거나, 어딘가에 숨겨져 있을 뿐.’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나는 손을 뻗어 조심스럽게 조각배를 들었다.
작고 허름한 나무 조각배. 하지만 그 안에는 오랜 시간 잊고 있던 추억과 희망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해란은 내 손에서 그 조각배를 잠시 냄새 맡더니, 이내 만족스러운 듯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르릉거리는 소리가 더욱 커졌다.
나는 해란을 품에 안았다. 녀석의 털 속으로 얼굴을 묻었다.
길고양이와의 대화는 항상 이런 식이었다.
녀석은 단 한마디의 사람 말을 하지 않았지만, 그 어떤 말보다도 명확하고 깊은 메시지를 전해주었다.
내가 잊고 있던 것을 찾아주고, 내가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 해주는 존재.
친구에게 연락할 용기가 생겼다기보다는,
다시 한번 그와의 연결고리를 찾아보려 노력할 마음이 생겼다는 것이 더 정확할 터였다.
이 작은 나무 조각배처럼, 우리의 우정도 어딘가에 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
그리고 그 희망을 찾아 나설 용기.
해란은 말없이 내게 그것을 건네주었다.
고요한 밤은 깊어지고 있었다. 해란은 내 무릎 위에서 잠이 들었고, 나도 오랜만에 찾아온 평화 속에서 눈을 감았다.
내일, 나는 무엇을 시작하게 될까.
어둠 속에서도 희미하게 빛나는 조각배처럼, 어쩌면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될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