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찾아온 길고양이와의 대화 – 제237화

멈춰 선 시간의 강가에서

창밖은 잿빛이었다. 하늘은 낮게 드리워져 금방이라도 무언가를 쏟아낼 듯했고, 바람은 아직 채 풀리지 않은 나뭇가지들을 거칠게 흔들었다. 지은은 찻잔을 든 채 창가에 앉아 있었다. 온기는 손끝에서 멀어져 심장까지 채 닿지 못하는 것 같았다. 어딘가 멈춰 선 듯한 시간 속에서, 그녀는 길을 잃은 듯했다.

요즘 들어 부쩍 그랬다. 지난날의 크고 작은 이야기들이 수없이 이어져 왔건만, 문득 모든 것이 희미해지고 앞으로 나아갈 길이 보이지 않는 듯한 기분. 마치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개 속에 홀로 서 있는 기분이었다.

그때였다. 창틀 너머 익숙한 은빛 털이 스쳐 지나갔다. 기다렸다는 듯 나타난 은빛. 녀석은 창문 턱에 사뿐히 올라서더니, 늘 그랬듯 지은의 눈을 깊이 들여다보았다. 말없는 위로, 혹은 질문이었다.

“은빛아.” 지은의 목소리는 갈라져 나왔다. “때로는 세상이 너무 복잡해서 숨이 막힐 것 같아. 내가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르겠고, 뭘 해야 할지도 모르겠어.”

은빛은 가느다란 꼬리를 한 번 흔들고는, 작게 하품을 했다. 그 여유로운 몸짓은 지은의 초조함을 더욱 부각시키는 듯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마음속 한구석을 느슨하게 만들었다. 녀석은 고개를 갸웃하며 지은의 곁으로 한 발짝 다가섰다.

“복잡함 속에서도 너는 너의 길을 찾았지. 언제나 그랬어. 기억나?” 은빛의 눈빛이 과거의 어느 한 점을 가리키는 듯했다. “저 거친 비바람 속에서도, 너는 가장 따뜻한 구석을 찾아내 나를 들였고, 나 또한 너의 차가운 밤을 지켜주었지.”

지은은 미소 지으려 했지만, 입가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은빛의 말은 오래전의 기억들을 불러왔다. 처음 녀석이 찾아왔던 날, 폭풍우가 몰아치던 밤, 서로에게 기댈 곳이 되어주었던 시간들. 그때는 막막한 현실 앞에서 어떻게든 버티려 애쓰던 시절이었다.

“그때는, 그냥 버텨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어. 앞이 보이지 않아도, 멈출 수는 없었으니까.” 지은은 찻잔을 내려놓고 은빛의 부드러운 털을 쓸었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게 제자리걸음 같아. 나만 멈춰 선 것 같아.”

은빛은 지은의 손길을 온전히 받아들이며 눈을 감았다. 녀석의 체온이 손끝으로 전해져 왔다. 따뜻하고, 견고한 생명의 온기였다.

“멈춰 선 것이 아니라, 잠시 쉬는 것일지도 몰라. 강물도 때로는 거친 여울을 지나 잠시 고요한 웅덩이에 머물며 힘을 모으는 법이지. 모든 흐름이 빠를 필요는 없어. 느리게 흘러도, 결국 바다에 닿는 것을.”

은빛의 말에 지은의 시선은 다시 창밖으로 향했다. 여전히 잿빛 하늘이었지만, 흐르는 구름 사이로 아주 희미하게 빛줄기가 비치는 것 같았다.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잠시 가려져 있을 뿐.

“하지만 언제까지 이렇게… 쉬고만 있을 수는 없잖아.” 지은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은빛은 눈을 떴다. 녀석의 녹색 눈동자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우주가 담겨 있었다. “어둠이 길어져도, 결국 작은 불꽃 하나가 길을 밝히는 법이지. 너의 마음속 그 불꽃을 잊지 마. 그 불꽃은 너를 멈추게 하지 않을 거야. 다만, 그 불꽃이 어떤 모양으로 타오를지, 어떤 빛깔로 세상을 비출지는… 오직 너만이 정할 수 있어.”

은빛은 지은의 팔에 머리를 부비고는, 창문 턱에서 사뿐히 뛰어내려 다시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지은은 한동안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텅 빈 손끝에는 은빛의 온기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녀석이 남긴 말들이 메아리처럼 귓가에 울렸다.

“너의 마음속 그 불꽃을 잊지 마.”

창밖의 안개는 여전했지만, 지은의 마음속에는 조금 다른 풍경이 펼쳐지는 듯했다. 보이지 않는 길이라고 해서 길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그 길은, 멈춰 선 시간의 강가에서 비로소 새로운 방향을 찾게 될 작은 불꽃을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주먹을 쥐었다. 차가웠던 손끝에 다시 온기가 돌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