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의 문턱을 넘어선 12월의 첫날, 서울은 새벽부터 시작된 눈으로 온통 은빛으로 뒤덮여 있었다. 창밖으로는 솜털 같은 눈송이들이 춤추듯 내려앉고 있었고, 그 광경을 무심한 듯 바라보는 한 여인이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하은. 서른 중반을 훌쩍 넘긴 나이에도 여전히 고요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그녀의 눈빛에는, 세월이 빚어낸 아련한 슬픔과 깊이를 알 수 없는 기다림이 공존했다.
하은은 자신의 작은 꽃집, ‘설화(雪花)’에 앉아 따뜻한 꿀차를 마시고 있었다. 가게 이름처럼 눈꽃은 매년 찾아왔지만, 그녀의 마음속에 피어나는 꽃은 언제나 시들지 않는 그리움이었다. 오늘은 유독 눈이 많이 내렸다. 마치 17년 전 그날처럼.
그때였다. 낡은 문에 달린 풍경이 맑은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문을 열고 들어선 이는 동네 우체국 직원 민준이었다. 그의 손에는 두툼한 소포 하나가 들려 있었다. “하은 씨, 특급우편이요. 발신인 주소가 좀 오래된 것 같은데요.” 민준은 머쓱하게 웃으며 소포를 건넸다. 하은은 소포를 받아 들고는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발신인 주소… 잊으려 애썼던, 그러나 한 번도 잊은 적 없는 그곳이었다.
오래된 주소의 소포
소포는 얇은 삼베 천으로 정성스럽게 싸여 있었고, 겉에는 아무런 문구도 쓰여 있지 않았다. 하은은 떨리는 손으로 포장지를 뜯었다. 안에는 낡은 나무 상자가 들어 있었다. 상자 뚜껑을 열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오래된 사진 한 장이었다. 풋풋한 미소를 머금은 십대 후반의 하은과 지원의 모습. 배경은 온통 눈으로 뒤덮인 남산이었다. 사진 속 지원은 하은의 손을 잡고 해맑게 웃고 있었다. 그들의 눈빛에는 세상의 어떤 어려움도 막을 수 없을 것 같은 굳건한 약속의 빛이 서려 있었다.
그 아래에는 닳고 닳은 가죽 수첩 한 권과 조각된 작은 나무 새 한 마리가 놓여 있었다. 하은은 나무 새를 집어 들었다. 투박하지만 섬세하게 깎인 새의 날개와 눈빛은 지원이 어릴 적부터 연습하던 솜씨 그대로였다. 그는 언제나 하은에게 ‘언젠가 너의 자유로운 영혼처럼 훨훨 날아다닐 새를 만들어 주겠다’고 말했었다.
수첩을 펼치자, 빽빽하게 채워진 글씨들이 눈에 들어왔다. 지원의 필체였다. 첫 페이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하은에게. 부디 이 수첩이 너에게 닿을 때쯤, 모든 오해가 풀리기를. 그리고 우리의 약속이 다시 빛나기를.’
하은의 눈가에 뜨거운 눈물이 맺혔다. 17년. 그 긴 세월 동안, 그녀는 매년 첫눈이 내리는 날이면 가슴 한편에 숨겨둔 희망과 절망 사이를 오갔다. 그는 “첫눈이 내리면, 반드시 돌아올게. 무슨 일이 있어도.”라고 속삭였었다. 그러나 그 약속은 매년 허공 속으로 흩어지는 눈꽃처럼 사라졌고, 하은은 그 약속의 덧없음 앞에서 점점 지쳐갔다.
그날의 약속, 그리고 침묵
하은은 수첩을 넘기기 시작했다. 첫 장부터 지원이 사라지기 전까지의 날들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가 사라진 후의 기록들도. 충격적이었다. 그가 사라진 것이 단순한 잠적이 아니었다. 부모님의 사업 실패와 연루된 어둡고 복잡한 사건들, 그리고 그를 노리던 세력들로부터 하은을 보호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내용이 절절하게 쓰여 있었다.
“하은아, 네가 이 글을 읽을 때쯤 나는 아마 너에게 아주 멀리 떨어져 있을 거야. 하지만 내 심장은 단 한 순간도 너를 떠난 적이 없어. 내가 떠나는 건 널 지키기 위해서야. 나 때문에 네가 위험해지는 걸 볼 수 없어. 그들이 널 찾아내기 전에, 내가 모든 것을 정리하고 돌아올게.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순간이 올지라도, 나를 미워하지 마. 내 마음은 언제나 너에게 닿아 있을 테니까.”
수첩의 마지막 페이지에는, 다른 필체로 쓰인 짧은 메모가 있었다. ‘이 수첩은 지원 씨가 병실에서 마지막 힘을 다해 쓴 것입니다.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하은… 첫눈…’ 이었습니다. 부디 그녀에게 전해지기를. – 최 실장 드림.’
하은은 무릎이 풀려 주저앉았다. 그는 이미…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자신의 곁을 떠난 것이 아니라, 세상 자체를 떠났던 것이다. 17년의 침묵이 그를 향한 원망이 아니었음을, 그의 약속이 거짓이 아니었음을, 이제야 알게 된 것이다. 그가 겪었을 고통과 외로움이 뼈저리게 전해져 왔다. 그녀는 그동안 겪었던 모든 슬픔과 그리움, 그리고 알 수 없었던 배신감까지 한꺼번에 터뜨리며 오열했다. 창밖으로는 여전히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새로운 발자취
얼마나 울었을까. 하은은 흐릿해진 시야로 다시 수첩을 집어 들었다. 마지막 메모 아래에는 흐릿한 글씨로 쓰인 주소 하나가 있었다. ‘경기도 외곽, 희망 요양병원 203호. 최 실장.’ 최 실장이라면, 지원의 가족이 운영하던 회사의 사람이었다. 혹시, 마지막 메모를 남긴 이가 아직 살아있다면….
그녀는 더 이상 주저할 수 없었다. 묵묵히 덮어두었던 아픔의 상자를 열었으니, 그 끝을 보아야만 했다. 그녀는 차 키를 들고 꽃집 문을 나섰다. 눈은 더욱 거세졌다. 굽이굽이 눈 쌓인 길을 헤치고 달려 도착한 희망 요양병원. 오래된 건물은 쓸쓸하게 눈을 맞고 있었다.
안내 데스크에 ‘최 실장’이라는 이름을 묻자, 나이 든 간호사가 잠시 망설이더니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최 실장님은 몇 년 전에 돌아가셨어요. 하지만… 지원 씨는 아직 203호에 계세요. 마지막 순간까지 당신을 기다리셨던….”
하은의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지원이 아직 살아있다고? 수첩의 메모는… 무엇이었을까? 희망과 혼란이 뒤섞인 채, 그녀는 간호사의 안내를 따라 203호 문 앞에 섰다. 쿵쾅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천천히 문고리를 돌렸다.
방 안은 따뜻했지만, 어두웠다. 창가에 놓인 침대에는 한 남자가 창밖을 응시한 채 앉아 있었다. 그의 등은 한없이 굽어 있었고, 머리카락은 새하얗게 변해 있었다. 그는 마치 눈 내리는 풍경에 완전히 동화된 듯 움직임이 없었다. 하은은 숨을 멈추었다. 그의 어깨는 너무나 왜소해 보였지만, 그 넓은 등은 17년 전 그녀에게 세상의 전부였던 그 등이었다.
하은의 발소리에 그가 아주 느리게 고개를 돌렸다. 오랜 병환과 세월의 흔적이 깊게 패인 얼굴. 하지만 그 눈빛만은 변하지 않았다. 고통과 회한, 그리고 헤아릴 수 없는 그리움으로 가득 찬 눈동자. 하은은 목이 메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눈물만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그의 입술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하은…아…” 쉰 목소리였지만, 하은의 귓가에는 17년 전 그 겨울날, 눈꽃이 흩날리던 언덕에서 속삭이던 그의 목소리 그대로였다.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기다려줘서….”
창밖에서는 여전히 눈꽃이 춤추듯 흩날리고 있었다. 17년 전, 겨울 눈꽃이 내리던 날의 약속은, 이렇게 처절하고 아프게, 그러나 마침내 이루어지고 있었다. 하은은 천천히 그의 곁으로 다가가, 조심스럽게 그의 차가운 손을 잡았다. 그 손은 그녀의 손안에서 미약하게 떨렸다. 그들의 재회는 세상의 어떤 격렬한 재회보다도 조용하고, 아리고, 그리고 진실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