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바닷바람이 낡은 해변가의 카페 창문을 흔들었다. 강지혁은 김이 오르는 커피잔을 든 채, 탁자에 놓인 낡은 사진 한 장을 응시했다. 사진 속에는 낡은 어선 한 척이 작은 포구에 정박해 있었고, 그 뒤로 언덕 위 그림 같은 집 한 채가 작게 보였다. 희미한 흑백 사진이었지만, 그 집의 독특한 지붕선은 지난 이십 년간 그가 쫓아온 모든 단서들을 합친 것보다 더 선명하게 유진을 향해 손짓하는 듯했다.
이번 단서는 뜻밖의 곳에서 시작되었다. 폐업 정리 중이던 오래된 미술품 경매장에서 발견된 무명 화가의 풍경화 한 점. 그림 속 붓질은 투박했지만, 한 구석에 작게 그려진 돛단배의 이름표, ‘에라토’, 그 단 하나의 디테일이 지혁의 심장을 거세게 울렸다. 에라토는 유진이 가장 좋아했던 그리스 신화 속 뮤즈의 이름이었다. 그녀는 읊조리듯 말했다. “에라토는 사랑의 시를 노래하는 뮤즈래요. 우리도 언젠가 그런 시 같은 사랑을 할 수 있을까?”
지혁은 그림의 출처를 쫓아 수소문했고, 결국 이 외딴 해변 마을, ‘푸른 등대 마을’까지 흘러들었다. 화가는 이미 오래전에 고인이 되었고, 그의 흔적은 낡은 창고와 몇몇 주민들의 희미한 기억 속에만 남아 있었다. 그들이 기억하는 화가는 늘 바다를 그렸고, 가끔 ‘멀리서 온 슬픈 눈빛의 아가씨’를 모델로 삼기도 했다고 했다.
“아가씨라니요?” 지혁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글쎄요, 한 20년도 더 전의 일인 것 같은데… 바람 부는 날에도 꼭 저기 언덕 위로 올라가 바다를 보곤 했어요. 딱 한 번, 화가 양반 작업실에서 그 아가씨 그림을 본 적이 있는데… 왠지 모르게 애잔한 느낌이었지.” 낡은 카페의 주인 할머니가 커피 리필을 해주며 중얼거렸다. “그런데 그 그림은 팔렸는지, 사라졌는지 모르겠네.”
지혁은 할머니가 가리킨 언덕을 바라봤다. 사진 속의 집이 바로 그곳이었다. 그는 황급히 계산을 마치고 카페를 나섰다. 바람은 더욱 거세어져 코트 자락을 휘감았다. 언덕길을 오르는 내내 그의 머릿속에서는 유진의 웃음소리와 그녀의 작은 몸짓들이 스쳐 지나갔다. 이십 년간 겹겹이 쌓인 그리움과 간절함이 발걸음마다 무게를 더했다. 혹시, 정말 혹시라도…
낡은 나무 대문이 바람에 삐걱거렸다. 덩굴식물에 뒤덮인 집은 폐가나 다름없었다. 지혁은 심장이 터질 듯한 압박감을 느끼며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퀴퀴한 먼지 냄새와 함께 지난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거미줄이 드리워진 창고 같은 방, 화가의 작업실이었을 공간에 들어서자, 캔버스 조각들과 굳어버린 물감 튜브, 그리고 먼지 쌓인 이젤이 눈에 들어왔다.
희망과 절망의 경계에서, 지혁은 낡은 테이블 서랍을 열었다. 텅 비어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그 안에 얇은 스케치북 한 권이 놓여 있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스케치북을 펼쳤다. 초상화 데생들이 대부분이었다. 풍경화도 몇 점 있었지만, 결정적인 것은 없었다. 그렇게 몇 장을 넘기던 중, 마지막 페이지에서 그의 시선이 멈췄다.
연필로 간신히 그려진 스케치. 어렴풋하지만 틀림없는 유진의 옆모습이었다. 해변에 앉아 먼 바다를 응시하는 그녀의 모습. 그리고 그 옆에, 작은 글씨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길. 그러나 언젠가, 사랑은 기억을 따라 다시 피어나리라.”
그 아래, 날짜가 희미하게 적혀 있었다. 유진이 사라진 지 딱 일 년 뒤의 날짜였다. 그리고 마지막 한 줄.
“동해, 등대 아래 작은 어촌. 그곳에… 그녀가 남긴 마지막 흔적이 있다.”
지혁은 스케치북을 가슴에 안았다. 메마른 눈가에 뜨거운 것이 맺혔다. 푸른 등대 마을은 그녀가 떠난 길의 시작점이자, 새로운 단서의 종착점이었다. 유진은 이곳에서 머물렀던 것일까? 아니면 이 화가가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던 것일까? 동해, 등대 아래 작은 어촌… 또 다시 새로운 길이 그의 앞에 펼쳐졌다. 이 길의 끝에서, 그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첫사랑이 기다리고 있을까. 지혁은 숨죽이며, 다음 여정을 준비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