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바람이 전해준 소식 – 제818화

그 해 봄바람은 유난히 따스했다

길고 긴 겨울의 끝을 알리듯, 산등성이를 타고 내려오는 바람은 더 이상 칼날 같지 않았다. 오히려 부드러운 손길로 얼어붙었던 세상의 껍질을 녹여내고, 앙상한 가지 끝에 연둣빛 생명을 불어넣는 듯했다. 서연은 마당 한켠 툇마루에 앉아 멀리 감악산 자락을 바라보고 있었다. 수십 년을 살아온 이 작은 마을은 여전히 고요했고, 그녀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한 오래된 상흔들도 봄기운에 조금씩 녹아내리는 듯했다.

따스한 햇살이 내려앉은 마당에는 작년에 심어 두었던 철쭉 새순이 돋아나고 있었다. 어제 내린 비로 촉촉해진 흙냄새와 싱그러운 풀 내음이 뒤섞여 코끝을 간지럽혔다. 서연은 눈을 감고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이 모든 것이 평화로웠고, 너무나 익숙했다. 하지만 그 익숙함 속에는 늘 지워지지 않는 그리움과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이 그림자처럼 드리워져 있었다.

“할머니, 또 그렇게 멍하니 계세요?”

어린 손자 지호의 맑은 목소리가 정적을 깼다. 유치원에서 돌아온 지호는 신발을 벗는 둥 마는 둥 서연의 품으로 달려들었다. 토실토실한 두 팔로 서연의 허리를 끌어안는 온기가 그녀의 마음에 작은 파문을 일으켰다.

“어허, 이 개구쟁이. 할머니 치마 다 구기겠다.”

서연은 웃으며 지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지호는 그녀의 품에서 고개를 들고 환하게 웃었다. 그 웃음에는 그녀가 잃어버렸던 모든 희망이 담겨 있는 듯했다. 지호는 서연에게 있어 고통스러운 삶을 버티게 한 유일한 빛이자, 끊임없이 용서와 인내를 가르쳐준 존재였다.

오래된 상자 속 기억

그날 오후, 마을 경로당에서 열리는 월례회에 다녀오던 서연은 뜻밖의 방문객을 맞았다. 마을 초입에 있는 작은 국밥집을 운영하는 김 할머니였다. 김 할머니는 허리도 제대로 펴지 못할 정도로 굽었지만, 눈빛만은 총기가 가득했다.

“서연아, 문 좀 열어라.”

김 할머니의 목소리에는 평소와 다른 묘한 긴장감이 실려 있었다. 서연은 허둥지둥 대문을 열었다. 김 할머니의 손에는 오래된 나무 상자가 들려 있었다.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상자는 마치 잊혀진 이야기를 담고 있는 듯했다.

“할머니, 웬 상자세요? 힘드신데 제가 들어드릴 걸 그랬어요.”

“아니다. 이건 네가 직접 받아야 할 것이야. 마침 오늘, 봄바람이 이 상자를 내게로 데려다주었지.”

김 할머니는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상자를 서연에게 건넸다. 서연은 조심스럽게 상자를 받아들었다. 상자의 무게는 가볍지 않았고, 그 안에는 뭔가 소중한 것이 담겨 있을 것 같았다. 그녀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대체 이게 뭔가요, 할머니?”

“네가 잃어버렸던 것, 혹은 잊고 있었던 것을 담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제 네가 열어볼 때가 된 게지.”

김 할머니는 더 이상의 설명 없이 서연의 어깨를 토닥이고는 돌아서서 길을 나섰다. 서연은 상자를 안고 멍하니 서 있었다. 따스한 봄바람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흩날렸다. 그 바람은 마치 김 할머니의 말처럼, 어떤 소식을 전하러 온 전령 같았다.

상자를 툇마루에 내려놓고 한참을 망설이던 서연은 결국 조심스럽게 뚜껑을 열었다. 낡은 상자 안에는 빛바랜 천 조각과 함께 두어 장의 사진, 그리고 얇은 편지 한 통이 들어있었다. 천 조각은 아기 배냇저고리 같았고, 사진 속에는 앳된 얼굴의 아이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리고 편지…

서연은 떨리는 손으로 편지를 집어 들었다.

봄바람이 전해준 소식

편지에는 삐뚤빼뚤한 글씨로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다.


“어머니께…
늦었지만, 너무 늦었지만 이제야 어머니께 소식을 전합니다.
저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늘 어머니를 찾고 그리워했습니다.
이 사진은 제가 어릴 적 제 보육원 선생님이 찍어주신 것입니다.
어머니가 저를 찾고 계셨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습니다.
제 이름은 지훈입니다. 엄마가 저에게 지어준 이름이라는 것을 압니다.
보고 싶습니다, 어머니.
다음 주 토요일, 오후 2시. 예전에 우리가 함께 살던 마을 입구 느티나무 아래에서 기다리겠습니다.
혹시나 저를 알아보지 못하실까 봐… 배냇저고리를 함께 보냅니다.
지훈 올림.”

편지를 읽는 내내 서연의 손은 걷잡을 수 없이 떨렸다. 눈물이 앞을 가려 글씨가 흐릿하게 보였지만, 그녀는 한 글자 한 글자 놓치지 않고 읽었다. 지훈… 지훈이었다. 그녀가 25년 전,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인해 이별할 수밖에 없었던 아들. 죽은 줄로만 알았던, 혹은 영영 찾지 못할 것이라 포기했던 아들의 이름이었다.

사진 속 아이의 얼굴은 어렴풋이 어린 시절의 자신과 닮아 있었다. 그리고 함께 들어있던 배냇저고리… 서연은 그것을 끌어안고 끅끅거리며 울기 시작했다. 잊었다고 생각했던, 억지로 마음속 깊이 묻어두었던 기억들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가슴속에서 오랫동안 짓눌려 있던 거대한 돌덩이가 한순간에 부서지는 것 같았다.

그녀는 젊은 시절의 불운과 고통, 그리고 사랑하는 이를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평생을 시달려왔다. 특히 아들 지훈과의 이별은 그녀의 삶을 지옥으로 만들었다. 매일 밤 꿈속에서 아들을 찾아 헤맸고, 매일 아침 죄책감에 시달렸다. 죽는 날까지 아들을 찾지 못할 것이라고, 아니 어쩌면 아들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절망해왔다.

그런데… 살아있었다. 그녀의 아들이 살아있었다. 그리고 그녀를 찾고 있었다.

따스한 봄바람이 창문으로 불어들어와 편지지를 살랑였다. 그 바람은 절망의 얼음장을 깨고 솟아오른 희망의 물줄기 같았다. 서연은 흐르는 눈물을 닦아낼 생각도 못 한 채, 그저 편지와 사진, 배냇저고리를 품에 안고 한없이 울었다. 25년 동안 참아왔던 눈물, 지훈을 향한 그리움, 그리고 이제야 찾아온 희망의 눈물이었다.

다음 주 토요일. 느티나무 아래.

그날까지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그녀에게는 영원처럼 느껴질 터였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막막하지 않았다. 봄바람이 전해준 소식은 그녀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기적과도 같았다. 서연은 상자를 소중히 끌어안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붉게 물들어가는 저녁노을 아래, 봄의 기운이 완연한 마을이 따스하게 그녀를 감싸 안는 듯했다. 새로운 시작, 새로운 희망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일 아침, 김 할머니에게 찾아가 감사의 인사를 전해야겠다고 서연은 생각했다. 그리고 그날, 그녀는 25년 만에 가장 평온하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