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바람이 전해준 소식 – 제833화

차가운 겨울의 그림자가 완전히 걷히고, 창밖으로는 희미한 연둣빛 생명들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지우는 작업실의 큰 창가에 앉아, 손때 묻은 붓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캔버스 위에는 여전히 완성되지 못한 인물의 옆모습이 흐릿하게 그려져 있었다. 언제나 그녀의 마음속에 자리한, 그러나 형체조차 흐릿해져 가는 얼굴. 그것은 바로 그녀의 쌍둥이 동생, 민준이었다.

“민준아…”

나직이 읊조린 이름은 봄바람에 실려 허공으로 흩어졌다. 따뜻하면서도 미묘하게 서늘한 바람이 창틈을 비집고 들어와,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스쳐 지나갔다. 이 바람은 매년 봄마다 희망과 함께 깊은 그리움을 실어 날랐다. 언젠가 그가 돌아올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그리고 끝없는 기다림의 고통을.

벌써 십수 년이 흘렀다. 열여덟, 세상을 함께 꿈꾸던 나이에 민준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모든 것을 함께 나누었던 반쪽이 사라진 후, 지우의 세상은 색을 잃었다. 그림은 그녀의 유일한 안식처이자 민준을 붙잡아두는 끈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덧칠하고, 아무리 채색해도, 그 빈자리는 채워지지 않았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봄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에서 아련한 풀 내음과 흙 내음이 섞여 들어왔다. 코끝을 간지럽히는 이 익숙한 향기 속에서, 문득 오래전 민준과 함께 뛰놀던 고향 마을의 뒷동산이 떠올랐다. 흐드러지게 핀 꽃들 사이에서 서로의 손을 잡고 달리던 그 시절. 그 순간만큼은 세상에 두려울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문득, 정적을 깨고 전화벨이 울렸다. 낯선 번호였다. 지우는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십 년 넘는 시간 동안, 그녀는 이런 예고 없는 전화 한 통에도 심장이 조여드는 습관이 생겼다. 혹시나 하는 희망과, 또다시 절망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뒤섞인 감정.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수화기 너머에서는 차분하지만 진중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신을 ‘한태수 형사’라고 소개한 그는 지우의 이름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은, 지우의 모든 세계를 일순간 정지시켰다.

“혹시… 동생 분 민준 씨에 대해 연락드렸습니다만…”

동생. 민준. 그 이름이 귀에 박히자마자, 지우는 자신이 숨 쉬는 법을 잊은 것 같았다. 심장이 격렬하게 요동치며 온몸의 피가 역류하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수화기를 든 손에 힘이 풀려, 전화기가 바닥에 떨어질 뻔했다. 그녀는 겨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네… 네? 민준이라고요? 정말… 정말 민준이가…?”

형사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부산의 한 병원에서 신원 불명의 환자가 발견되었는데, 인상착의가 지우 씨가 오래전 실종 신고했던 동생 분과 일치한다는 내용이었다. 발견 당시 심각한 외상과 기억 상실을 겪고 있었고, 의식은 있었으나 자신의 이름조차 말하지 못했다고 했다. 오랜 수색 끝에 남아있던 기록과 대조하여 겨우 신원을 확인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였다.

지우는 온몸의 힘이 빠져나가 주저앉았다. 희미하게 들려오는 형사의 목소리는 마치 멀리 떨어진 바다의 파도 소리처럼 아득하게 들렸다. 민준이 살아있었다니. 이 모든 긴 기다림이, 이 모든 고통이, 헛된 것이 아니었다니. 그녀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봇물처럼 쏟아져 내렸다. 희망이라는 단어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너무나 거대한 감정의 파도였다.

“당장 갈게요… 지금 바로…”

그녀는 흐느끼는 목소리로 간신히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손이 덜덜 떨려왔다. 눈물과 콧물이 뒤섞여 엉망이 된 얼굴로도 그녀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창밖의 봄바람은 여전히 부드럽게 나뭇가지들을 흔들고 있었다. 그 바람이 그녀에게 전해준 소식은, 그녀의 메마른 세상에 비를 내리게 하는 것 같았다.

***

부산으로 향하는 KTX 안에서 지우는 내내 창밖만 바라보았다.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풍경들은 그녀의 들끓는 마음을 대변하는 듯했다. 산과 들이 연둣빛 옷을 갈아입고, 도시의 풍경들도 생기를 되찾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시선은 정지된 과거에 머물러 있었다. 민준이 어떤 모습으로 그녀를 맞이할까? 아니, 그녀를 알아볼 수 있을까?

십여 년 만에 마주할 동생의 얼굴. 얼마나 변했을까. 아니, 변하지 않았기를 바랐다. 그가 겪었을 고통의 시간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저며왔다. 그녀가 평화롭게 그림을 그리며 살 동안, 민준은 어디에서, 어떻게 홀로 버텨냈을까. 그 질문들이 파도처럼 밀려와 그녀의 심장을 때렸다.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한태수 형사의 안내를 받아 병실로 향했다. 복도는 소독약 냄새와 알 수 없는 불안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심장이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것 같았다. 한 걸음 한 걸음이 천 년 같았다. 마침내 병실 문이 눈앞에 나타났다.

“지우 씨, 마음의 준비를… 아직 많이 불안정합니다.”

형사의 조용한 경고에도 지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심호흡을 하고,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잡았다. 삐걱이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차가운 병실 안의 공기가 그녀를 감쌌다.

침대에는 한 남자가 창밖을 등지고 앉아 있었다. 깡마른 몸에, 헝클어진 머리카락. 어깨는 축 처져 있었고, 그 뒷모습에서는 깊은 상실감과 피로가 느껴졌다. 지우의 눈에는 그 남자의 어깨에 흐릿하게 보이는 점 하나, 어릴 적 장난으로 생긴 희미한 흉터가 또렷하게 들어왔다. 민준이었다. 틀림없는 민준이었다.

“민… 민준아.”

갈라지는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남자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순간, 지우는 숨을 멈췄다. 십 년 넘게 꿈속에서 헤매고 그리워했던 그 얼굴. 그러나 눈앞의 민준은, 그녀가 기억하는 활기 넘치고 장난기 가득했던 소년의 얼굴이 아니었다.

초점 없는 눈동자, 깊이 파인 광대뼈, 생기 없는 피부. 세월의 흔적과 고난이 고스란히 새겨진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 얼굴의 윤곽, 눈매, 코끝. 모든 것이 그녀의 기억 속 민준과 기묘하게 겹쳐졌다. 그가 멍하니 지우를 바라보았다. 아무런 감정도, 아무런 인식도 없는 듯한 공허한 시선이었다.

“민준아… 나야. 지우. 너의 누나… 아니, 쌍둥이 누나 지우야.”

지우는 한 발자국, 또 한 발자국 다가갔다. 눈에서는 멈추지 않고 눈물이 흘렀다. 그녀의 목소리는 흐느낌에 잠겨 떨렸지만, 그 속에는 억눌렸던 사랑과 절규가 뒤섞여 있었다. 민준은 여전히 아무 말 없이 그녀를 응시했다. 마치 처음 보는 사람처럼, 낯선 풍경을 마주한 것처럼.

지우는 침대 옆에 주저앉아, 그의 차가운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뼈마디가 도드라진 거친 손이었다. 이 손이, 한때는 그녀의 손을 꼭 잡고 들판을 뛰어다니던 작고 부드러운 손이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민준아… 기억 안 나? 우리 어릴 때… 우리 엄마 아빠… 그리고 우리 작업실에 걸린 그림들… 네가 가장 좋아했던 뒷동산의 들꽃들… 다 기억 안 나?”

그녀는 그의 손을 잡은 채, 자신의 얼굴에 가져다 대었다. 따뜻한 눈물이 그의 손등을 적셨다. 민준의 눈빛에 아주 미세한 떨림이 스쳤다. 마치 오래된 기억의 파편이 잠시 스쳐 지나간 것처럼.

그때였다. 창밖에서 불어온 봄바람이 병실 안으로 살짝 스며들었다. 창가에 놓인 작은 화분의 잎사귀들이 흔들리고, 희미한 꽃향기가 콧속을 스쳤다. 민준의 시선이 그 향기를 쫓듯, 창밖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순간, 아주 짧게, 그의 눈빛에 무언가 스쳐 지나갔다. 그리움? 혼란? 아니면 아주 어렴풋한 인지의 순간이었을까.

그는 다시 지우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치 오랜 꿈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희미하게 입술을 움직였다.

“…지우…?”

너무나 작고 희미한 목소리였지만, 지우에게는 천둥처럼 크게 울렸다. 그녀는 온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그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십 년이 넘도록 듣고 싶어 했던, 그 목소리가. 지우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빛은 여전히 공허했지만, 방금 그 순간만큼은 그녀를 향해 있었다.

“민준아… 민준아!”

지우는 그의 품에 와락 안겼다. 그가 비록 뼈만 남은 앙상한 몸이었지만, 그녀는 그 온기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흐느끼며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오랫동안 멈춰있던 시간들이 비로소 다시 흐르기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봄바람이 전해준 소식은, 단순한 만남이 아니었다. 그것은 사라졌던 과거를 다시 연결하고,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내야 하는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거대한 파랑이었다.

지우는 민준의 앙상한 어깨를 감싸 안은 채 생각했다.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그가 겪었을 고통의 시간들을 어떻게 위로할 수 있을까. 잃어버린 기억들을 어떻게 되찾아 줄 수 있을까. 그리고 무엇보다, 그에게 다시 삶의 이유를 찾아줄 수 있을까. 봄바람은 희망의 소식을 전해주었지만, 그 소식 뒤에는 또 다른, 길고 험난한 여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그의 손을 놓지 않았다. 절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