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찾아온 길고양이와의 대화 – 제828화

창문 밖은 이미 초겨울의 스산함이 내려앉고 있었다. 회색빛 하늘 아래, 앙상한 나뭇가지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은 내 마음속 깊이 숨어있던 오래된 불안을 건드리는 듯했다. 손에 든 따뜻한 차 한 잔으로는 쉬이 가라앉지 않는 그런 종류의 감정이었다. 나는 한숨을 쉬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때였다. 내 무릎 위에서 꾸벅꾸벅 졸던 달빛이 미미한 움직임을 보였다. 고요한 공간 속에서, 녀석의 털 부스럭거리는 소리마저 크게 들리는 듯했다. 달빛은 느릿하게 눈을 떴다. 짙은 호박색 눈동자가 나를 올려다본다. 그 눈빛 속에는 늘 그랬듯, 내가 미처 말하지 못한 감정들까지 읽어내는 듯한 깊이가 담겨 있었다.

“무슨 일이야, 달빛?” 나는 나지막이 물었다. 녀석이 내 무릎 위에서 몸을 둥글게 말고는 앞발을 뻗어 내 팔뚝을 툭 건드렸다. 그 작은 접촉이 파르르 떨리는 내 감정의 실타래를 살며시 붙잡아주는 것 같았다.

‘또 그 생각에 잠겨 있었군.’

달빛의 목소리가 내 안에서 또렷하게 울렸다. 소리 없이 오가는 대화는 우리 둘만의 은밀한 언어였다. 나는 피식 웃었다. 이제는 놀랍지도 않았다. 수많은 세월을 함께하며 우리는 서로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법을 익혔으니까.

“응. 가을 끝자락만 되면 꼭 그렇잖아.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꼭 이렇게 차가운 바람이 불면 다시 찾아와.”

내가 말하는 ‘그 생각’은 수년 전, 내가 내렸던 한 가지 선택에 대한 후회였다. 그때 조금만 더 용기를 냈더라면, 그때 조금만 더 다른 길을 택했더라면 지금의 나는 어떤 모습일까 하는 부질없는 상상. 물론 지금의 삶이 불행하다는 것은 아니었다. 달빛이 내 곁에 있고, 소박하지만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고 있으니. 하지만 때로는, 이루지 못한 꿈이 그림자처럼 드리울 때가 있었다.

달빛은 가만히 내 얼굴을 응시하더니, 부드러운 머리를 내 허벅지에 비볐다. 그 온기가 전해져 왔다.

‘모든 선택에는 그림자가 드리우는 법이야. 선택하지 않은 길은 언제나 더 아름답게 보이기 마련이지. 하지만 수아, 너는 너만의 길을 걸어왔고, 그 길 위에서 많은 것을 얻었어.’

“얻었지… 달빛 너도 얻었고. 하지만 가끔은, 내가 잃어버린 것들이 너무 크게 느껴져. 그 길을 걷지 않았기에 놓쳐버린 것들이 말이야.” 내 목소리에는 미약한 떨림이 섞여 있었다.

달빛은 자리에서 일어나 내 어깨까지 폴짝 뛰어올랐다. 그리고는 녀석의 털이 부드럽게 내 뺨을 스쳤다. 따뜻하고 포근한 감촉. 녀석의 체온이 그대로 전해졌다.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선택하지 않은 것일 뿐이야. 그리고 그 선택 덕분에 너는 여기에 있고, 나는 너의 곁에 있어. 우리가 함께 나누는 이 순간이, 너의 모든 선택의 결과물인 걸.’

달빛의 말은 언제나 단순하지만, 내 마음을 꿰뚫는 힘이 있었다. 내가 달빛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나는 지금의 나만큼 평온하고 단단해질 수 있었을까. 어쩌면 그 후회라는 감정의 늪에 더 깊이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네 말이 맞아…” 나는 달빛의 부드러운 털을 쓰다듬었다. 녀석은 만족스러운 듯 ‘갸르릉’ 소리를 냈다. 그르렁거리는 진동이 내 어깨를 통해 온몸으로 퍼지는 것 같았다. “내가 선택한 길 위에 네가 있어서 다행이야.”

달빛은 고개를 들어 내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그 눈빛 속에서 나는 흔들림 없는 확신과 무한한 애정을 읽을 수 있었다.

‘후회는 과거에 머무는 그림자일 뿐. 중요한 건 지금 네가 가진 온기, 그리고 앞으로 걸어갈 길이야. 그리고 그 길에서, 나는 언제나 네 곁에 있을 거야.’

나는 달빛을 끌어안았다. 녀석의 작고 따뜻한 몸이 내 품에 쏙 안겼다. 외부의 차가운 바람과는 대조적으로, 우리 둘만의 공간은 더할 나위 없이 따뜻하고 아늑했다. 후회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달빛과의 대화를 통해 그것을 껴안고 살아가는 법을 또 한 번 배운 듯했다. 과거의 그림자에 갇히는 대신, 지금 이 순간의 따뜻함에 집중하는 법을.

창밖의 바람 소리는 여전했지만, 더 이상 나를 흔들지 못했다. 내 곁에는 달빛이 있었고, 우리는 서로의 온기가 되어주고 있었다. 어쩌면, 인생의 모든 선택은 결국 이 따뜻한 한 순간을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달빛의 부드러운 털 속으로 얼굴을 묻으며, 나는 작은 미소를 지었다. 이제 정말 겨울이 오더라도 괜찮을 것 같았다. 우리는 함께 그 계절을 견뎌낼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