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잃어버린 시간 여행자 – 제263화

이안은 차가운 찻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해 질 녘, 고요한 한옥 서재에는 숯불 난로의 은은한 온기와 오래된 종이 냄새가 가득했다. 창밖으로는 겨울의 초입에 들어선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앙상한 나뭇가지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마저 평화로웠다. 유진은 그런 이안의 옆에서 오래된 지도를 펼쳐 놓고 무언가를 골똘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오늘도 별다른 소득은 없네요. 흐릿한 표식들뿐이라.” 유진의 목소리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이안의 잃어버린 시간을 향한 집념으로 빛나고 있었다. 유진은 이안이 이곳에 불시착한 이래로, 그의 유일한 연결고리이자 지지대였다.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자신을 ‘이안’이라 부르며, 끈질기게 그의 조각난 기억을 찾아 헤매는 유진을 보며 이안은 때때로 알 수 없는 죄책감과 동시에 깊은 안도감을 느꼈다.

이안은 대답 없이 탁자 위 놓인 작은 오르골에 시선을 주었다. 낡고 바랜 나무 상자, 표면에는 섬세하게 조각된 이름 모를 꽃무늬가 음각되어 있었다. 유진이 어느 날 고물상에서 찾아왔다며 선물한 것이었다. 이안의 조각난 기억 중 하나라도 건져 올릴 수 있을까 하는 작은 희망 때문이었다. 그 오르골은 한 달 전부터 이안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묘한 불안감을 주었다. 손끝에 닿는 차가운 나무의 감촉, 희미하게 느껴지는 낯선 향기. 이안은 조심스럽게 태엽을 감았다.

딸깍, 딸깍. 그리고 이어지는 맑고 영롱한 음율. 익숙한 듯 낯선 멜로디가 서재의 공기를 가득 채웠다. 그 순간, 이안의 머릿속을 강타하는 거대한 파동이 일었다. 눈앞이 하얗게 번뜩이며, 수많은 잔상들이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 거친 엔진 소리, 그리고… 환하게 웃고 있는 한 여인의 얼굴. 그 얼굴은 흐릿했지만, 그 웃음소리만큼은 귓가에 선명하게 울려 퍼지는 듯했다. “이안, 이 노래 기억나? 우리가 처음 만난 날….”

숨이 막혔다. 이안은 가슴을 쥐어 잡았다. 오르골의 멜로디가 가슴 깊은 곳에 묻혀 있던 거대한 슬픔의 덩어리를 끄집어낸 듯했다. 눈물이 저절로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기억을 잃은 후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시리고 아픈 감정이었다.
유진이 놀라 이안에게 달려왔다. “이안 씨! 괜찮으세요? 어디 아프세요?” 그녀의 손이 이안의 이마에 닿았다. 열은 없었다. 하지만 이안의 눈은 깊은 혼란과 고통으로 가득 차 있었다.

“유진… 유진 씨…” 이안은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입을 열었다. “나는… 나는 저 노래를 알고 있어요. 아주 오래 전부터….”
유진은 조용히 이안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눈빛에는 기대와 염려가 교차했다. “무언가 기억나신 건가요? 어떤 것이라도 좋아요. 말해주세요.”

이안은 눈을 감고 방금 스쳐 지나간 잔상들을 붙잡으려 애썼다. 여인의 얼굴, 그녀의 웃음소리, 그리고 어렴풋이 들려오던 기계음.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 여인이 입고 있던 옷의 깃 부분에 새겨진 작은 문양. 단순한 기하학적 도형이었지만, 이안의 심장을 강하게 울렸다.
“그녀는… 그녀는 나를 불렀어요. ‘이안’이라고. 그리고… 이안…” 이안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녀가… 위험했어요. 아주 큰 위험에 처해 있었어요.”

멜로디는 어느새 멈춰 있었다. 서재는 다시 고요함에 잠겼지만, 그 침묵은 이전과는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상실감과, 이제 막 눈을 뜬 듯한 불안감이 공기를 무겁게 짓눌렀다. 유진은 이안의 말을 들으며, 탁자 위 지도를 응시했다. 그녀의 시선은 지도의 한쪽 구석에 흐릿하게 그려진, 이안이 방금 묘사한 것과 유사한 문양에 닿아 있었다.

“위험…이라니요?” 유진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혹시 그 문양이… 이 지도에 있는 이 표식과 같은 것인가요?” 유진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에는, 오래된 잉크로 겨우 형태만 알아볼 수 있는 작은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그것은 먼 과거의 어떤 시대에 존재했던, 금지된 기술의 상징이자 동시에 강력한 세력의 표식이었다.

이안은 유진의 손가락 끝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 문양을 본 순간, 그의 머릿속에 또 다른 파편이 번쩍였다.
어둠 속에서 번뜩이던 붉은 빛, 차가운 금속성 총성, 그리고… 절규하는 여인의 목소리.
“도망쳐, 이안! 제발…!”

심장이 발밑으로 곤두박질치는 듯했다. 이안은 그제야 깨달았다. 방금 스쳐 지나간 기억은 단순한 과거의 회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경고였다. 자신을 ‘이안’이라 부르던 그 여인은… 그 금지된 문양과 연관된 이들에게 쫓기고 있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 사건은 이안 자신이 기억을 잃게 된 이유와도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을 터였다.

“그들이… 그들이 그녀를 쫓고 있었어요.” 이안의 목소리는 갈라져 나왔다. “나는… 나는 그녀를 구해야 해요. 그녀가 어디 있는지 알아야만 해요.”
유진은 이안의 흔들리는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녀의 표정은 결연했다. “이안 씨. 이 지도의 이 표식은… 이 시대에는 사라진 것으로 알려진, 아주 위험한 집단의 문양이에요. 하지만 최근 들어 이와 비슷한 사건들이 주변 지역에서 감지되고 있습니다. 어쩌면… 당신의 기억이 돌아온다는 것은, 그들이 다시 활동을 시작했다는 의미일지도 모릅니다.”

창밖의 어둠은 더욱 깊어지고 있었다. 차가운 바람이 서재의 문틈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안은 오르골을 꽉 쥐었다. 멜로디는 이제 멈췄지만, 그의 가슴속에는 새로운 선율이 울리고 있었다. 망각 속에 갇혀 있던 사랑하는 여인의 이름 모를 비명, 그리고 그녀를 구해야 한다는 절박한 사명감. 기억의 파편이 부활시킨 것은 고통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잃어버린 임무의 시작이었다. 이제 이안은 더 이상 멈춰 있을 수 없었다. 자신을 불렀던 그 여인을 찾아야 했다. 그들이 오기 전에. 아니, 이미 그들이 왔을지도 모른다는 섬뜩한 예감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