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눈꽃이 내리던 날의 약속 – 제834화

끝없이 쌓이는 고독의 발자국

새벽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은 창밖 세상을 온통 하얗게 뒤덮었다. 서연은 뜨거운 커피잔을 두 손으로 감싼 채, 거실 창가에 서서 밤새 쌓인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창문은 희뿌연 김으로 가득했고, 그 너머로 보이는 세상은 어딘가 비현실적이었다. 마치 오래된 수채화처럼 모든 윤곽이 부드럽게 번져 있었고, 거리의 가로등 불빛마저 눈송이에 갇혀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오늘이 그날이었다. 매년 이맘때쯤 찾아오는, 기억의 심연을 흔드는 날.

서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찰나의 순간, 눈보라가 휘몰아치던 십여 년 전의 겨울날이 스쳐 지나갔다. 맹렬하게 쏟아지던 함박눈 아래, 붉게 언 손을 잡고 서로의 온기를 나누던 두 개의 작은 그림자. 그리고 귓가에 속삭이던,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그 목소리.

“서연아, 약속해. 어떤 일이 있어도, 우리 겨울 눈꽃이 다시 내리면 꼭 여기서 다시 만나는 거야.”

그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하게 심장을 울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약속은, 그 후로 수없이 많은 겨울을 지나면서 서연의 가슴에 깊은 상처로 남았다. 지켜지지 않은 약속은 때로는 맹목적인 믿음을, 때로는 사무치는 그리움을, 그리고 때로는 지울 수 없는 원망을 낳았다.

서연은 시선을 돌려 탁자 위에 놓인 작은 나무 상자를 보았다. 오래전 하준이 직접 깎아 만들어 준, 투박하지만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는 상자였다. 그 안에는 그 약속의 날, 하준이 건네주었던 작은 목걸이가 들어있었다. 눈꽃 모양의 은 펜던트.

손을 뻗어 상자를 만졌다. 차가운 나무의 감촉이 손끝에 닿자, 잊고 지내려 애썼던 고통스러운 기억들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새로운 그림자

“서연 언니, 괜찮으세요?”

나지막한 목소리가 서연의 뒤편에서 들려왔다. 서연은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동생 지윤이었다. 지윤은 따뜻한 수면 잠옷 차림으로,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서연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윤아, 벌써 일어났어? 푹 자지 그랬어.”

서연은 애써 미소 지으며 말했다. 지윤은 서연의 옆으로 다가와 함께 창밖을 응시했다.

“눈이 너무 많이 와서요. 언니가 오늘 이 시간에 깨어 있을 것 같아서 와봤어요.”

지윤은 서연의 손에 들린 커피잔을 슬쩍 바라보았다. 지윤 역시 서연의 오랜 아픔을 알고 있었다. 하준이 사라진 후, 서연이 겪었던 고통의 나날들을 옆에서 지켜봐 온 유일한 사람이었다.

“오늘, 그 장소에 가볼 생각이에요.”

서연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흘러나왔다. 지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언니… 정말요? 십 년 만에 처음이잖아요.”

그렇다. 하준이 사라진 후, 서연은 그 약속 장소에 단 한 번도 찾아가지 않았다. 그곳에 발을 들이는 순간, 자신이 무너져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준이 홀로 남긴 빈 약속을 붙들고 헛된 희망을 품는 것이 두려웠다.

“더 이상 피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제는… 직면해야 할 때가 온 것 같아요.”

서연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지난밤 잠 못 이루며 고뇌했던 시간들이 떠올랐다. 하준의 실종 이후, 수많은 추측과 루머가 서연을 괴롭혔다. 그가 배신했다는 말, 다른 곳으로 떠났다는 말, 심지어는 사고를 당했다는 말까지. 하지만 그 어떤 것도 확실한 진실은 아니었다. 그저 영원히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만이 서연을 짓눌렀을 뿐.

그리고 며칠 전, 서연의 회사로 한 통의 익명 우편물이 배달되었다. 낡고 바랜 사진 한 장. 사진 속에는 눈보라 속의 서연과 하준, 그리고 그들의 약속 장소가 흐릿하게 담겨 있었다. 사진 뒷면에는 단 세 글자만이 쓰여 있었다.

‘진실은…’

그 알 수 없는 메시지는 서연의 잠자고 있던 마음을 다시 흔들었다. 지난 십 년간 굳게 닫았던 기억의 문이 조금씩 열리는 느낌이었다.

오래된 약속의 자리

장갑으로 무장한 손으로 스티어링 휠을 잡았다. 제설차가 지나간 도로는 그나마 나았지만, 이면도로로 접어들자 눈은 족히 발목까지 차올랐다. 서연은 익숙한 길을 따라 차를 몰았다. 하얀 눈밭 위로 타이어 자국이 선명하게 새겨졌다.

도심을 벗어나 외곽으로 향할수록, 세상은 더욱 고요하고 순결해졌다. 목적지는 마을 어귀에 위치한 작은 언덕이었다. 그 언덕 정상에는 수령이 수백 년은 족히 넘어 보이는 거대한 느티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어릴 적 서연과 하준에게는 그 나무가 세상의 중심이자 비밀의 요새였다.

차를 세우고 눈밭에 발을 디뎠다. 뽀드득거리는 눈 밟는 소리가 정적을 깨고 울려 퍼졌다. 거친 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들었고, 쌓였던 눈가루가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서연은 천천히 언덕을 올랐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심장의 박동이 더욱 강하게 울렸다. 마치 십 년 전의 그날로 되돌아가는 것 같았다. 어린 서연과 하준이 숨을 헐떡이며 오르던 그 언덕을, 이제는 굳은 결심을 한 서연이 홀로 오르고 있었다.

드디어 느티나무 아래에 도착했다. 거대한 나무는 지난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굵고 울퉁불퉁한 나무껍질 위로 눈이 소복이 쌓여 있었다.

서연은 나무둥치에 기대어 앉았다. 차가운 한기가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은 뜨거웠다.

“서연아, 약속해. 어떤 일이 있어도, 우리 겨울 눈꽃이 다시 내리면 꼭 여기서 다시 만나는 거야.”

하준의 목소리가 다시 귓가에 맴돌았다. 그 약속을 하던 순간, 하준의 눈빛은 너무나도 진지하고 슬퍼 보였다. 마치 헤어짐을 예감이라도 한 듯이.

서연은 천천히 손을 들어 나무껍질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의 손끝에 무언가 딱딱한 것이 걸렸다. 나무껍질 틈새에 끼어있는 작은 조각.

조심스럽게 그것을 꺼내 들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하준이 착용했던 군번줄의 일부였다. 녹이 슬고 빛이 바랬지만, 익숙한 문양이 희미하게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군번줄 조각에는 또 다른 작은 쪽지가 매달려 있었다. 눈에 젖어 살짝 불어있었지만, 아직 글씨를 알아볼 수 있었다.

서연의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심장이 발밑으로 쿵 떨어지는 것 같았다.

쪽지에는 하준의 필체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서연아, 미안해. 그리고… 사랑해. 내가 돌아오지 못하더라도, 너는 반드시 행복해야 해. 그리고 이 약속은… 지켜지지 못할 거야. 하지만 내가 너를 지키기 위해…’

마지막 문장은 눈물과 습기에 번져 더 이상 읽을 수 없었다.

서연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봇물처럼 쏟아져 내렸다. 차가운 눈 위로 떨어지는 눈물은 이내 얼어붙었다. 십 년간 억눌러왔던 슬픔과 혼란, 그리고 알 수 없는 진실의 조각들이 한꺼번에 밀려들어 왔다.

하준이 약속을 지키지 못한 이유. 그가 서연을 지키기 위해 무엇을 했던 것일까? 이 군번줄 조각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가 살아 있다는 것인가? 아니면…

그때였다. 언덕 아래에서 누군가 천천히 걸어 올라오는 모습이 서연의 눈에 들어왔다. 검은 코트 차림의 남자는 눈밭을 헤치며 느티나무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의 모습은 점점 선명해졌고, 서연은 숨조차 쉴 수 없었다.

키가 크고 어깨가 넓은 남자. 차분하게 가라앉은 표정. 그리고… 십 년 전, 자신의 곁을 홀연히 떠났던 그 남자와 너무나도 닮은 모습.

서연의 가슴이 미친 듯이 뛰었다. 착각일 리 없었다. 이 세상에, 그와 이토록 닮은 사람은 존재할 수 없을 터였다.

남자는 서연을 발견하고는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그의 시선이 서연의 손에 들린 군번줄 조각에 머물렀다. 그의 눈빛에 형용할 수 없는 슬픔과 회한이 스쳐 지나갔다.

“서연아…”

낮게 깔린 목소리가 눈밭 위로 울려 퍼졌다. 십 년 만에 듣는, 너무나도 익숙한 그 목소리.

서연은 손에 들고 있던 군번줄 조각과 쪽지를 떨쳤다. 그것들은 하얀 눈 위로 사뿐히 내려앉았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그 자리에 서 있는 남자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하준.

그가 돌아온 것일까. 아니면, 이 모든 것이 차가운 겨울 눈꽃 아래 서연이 꾸는, 십 년 만의 가장 잔혹한 꿈일까.

눈은 여전히 소리 없이 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