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바람이 전해준 소식 – 제265화

봄의 서곡

지은의 작은 아틀리에 창문 틈으로 스며드는 봄바람은 여전히 차가웠지만, 그 속에선 이미 대지가 깨어나는 비릿하고도 신선한 냄새가 났다. 마른 나뭇가지 끝에 맺힌 작은 봉오리들이 터지기 시작하고, 흙 속에서 녹색의 연약한 싹들이 고개를 내미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지은에게 봄은 언제나 그랬듯 양면의 계절이었다. 생명의 약동이 찬란한 만큼, 피어날 듯하다 져버린 한 생명에 대한 아릿한 기억이 그림자처럼 드리우는 시간.

비단 위에 붓을 멈춘 그녀의 손가락은 아직 미완성인 풍경화 위에서 잠시 망설였다. 캔버스 위에 펼쳐진 동틀 녘의 선명한 색채는 그녀의 마음속 황혼을 비웃는 듯했다. 붓질 하나하나에 그녀의 삶이, 억누른 아픔과 희망이 담겨 있었지만, 오늘은 유난히 붓끝이 무거웠다. 켜켜이 쌓인 시간의 먼지 속에서 어떤 소식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 줄은 꿈에도 알지 못했다.

오랜 침묵을 깨고

오후 햇살이 길게 늘어지는 시간, 낡은 문이 삐걱이며 열렸다. “지은아, 정말 오랜만이다!” 뜻밖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눈가에 잔주름이 가득한 김여사님이 활짝 웃고 계셨다. 동네 어귀에서 몇 대째 문방구를 운영하던 김여사님은, 지은의 삶이 송두리째 흔들렸던 그 끔찍한 사건 이후로 거의 만나지 못했던 사람이었다. 김여사님은 돋보기 너머로 지은을 찬찬히 훑어보더니, 낡은 지갑에서 바래고 구겨진 사진 한 장을 꺼내 내밀었다.

“어제 말이야, 우리 손주가 대학교 졸업식 사진을 보내왔는데… 글쎄, 거기에 이 아이가 있더라. 현우 말이야. 너랑 어쩜 그리 닮았는지, 한참을 쳐다봤지 뭐야.”

‘현우’. 그 이름 석 자는 스무 해가 넘도록 그녀의 심장 가장 깊은 곳에 묻혀 있던 봉인된 기억을 단번에 깨부수는 망치 소리 같았다.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듯한 충격에 지은은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현우. 그녀의 현우.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분명 사라졌었다. 그렇지 않았던가?

되살아난 그림자

지은의 손이 떨렸다. 김여사님에게서 건네받은 사진 속에는 훤칠하고 듬직한 청년이 서 있었다. 고집스러움과 다정함이 함께 깃든 듯한 눈빛, 살짝 비스듬히 올라간 미소… 마치 젊은 시절의 자신을 왜곡된 거울로 보는 듯했다. 흐으읍, 하고 가녀린 숨소리가 목구멍에서 터져 나왔다. 믿을 수 없었다. 의료진은 이미 사망을 확신했었고, 보육원 원장님조차 화재 이후의 혼란 속에서 찾을 길이 없었다고 했다. 그녀의 아기, 현우는 그렇게 세상을 떠났거나, 아니면 어디론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25년간, 그 슬픔은 그녀의 가슴에 차갑고 무거운 돌덩이처럼 박혀 있었다. 시간의 거센 파도에 마모되었을지언정 결코 사라지지 않는 고통이었다. 그 고통은 그녀의 삶을 형성했고, 상실의 추함에 대항하듯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예술가의 길로 그녀를 이끌었다. 그녀는 다시는 소중한 것을 잃을까 두려워, 비관이 아닌 깊은 상실의 공포 속에서 마음 주위에 높은 벽을 쌓아 올렸다.

“김여사님… 정말… 확실하세요?” 지은의 목소리는 갈라진 실 같았다.

김여사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 슬프면서도 온화한 빛으로 반짝였다. “그럼! 내가 사람 얼굴을 잊겠니? 게다가 이 아이가 예전 옆집 김씨 댁 손녀와도 아는 사이라고 하더군. 아, 그리고 요즘 ‘푸른 보금자리’ 재단에서 일한다고 들었어. 봉사하는 마음씨가 너랑 똑같아.”

새로운 계절의 문턱에서

‘푸른 보금자리’. 재난으로 헤어진 가족들의 재회를 돕는다는 그 재단. 지은이 지난 몇 년간 말없이 후원해왔던 곳이었다. 그때는 알 수 없었던 보이지 않는 공감의 끈이 그녀를 그곳으로 이끌었으리라. 이 엄청난 우연에 지은은 그저 할 말을 잃었다. 이것은 잔인한 운명의 장난일까, 아니면 자비로운 기적일까. 살랑이던 봄바람은 이제 폭풍이 되어 그녀의 삶의 견고한 성을 무너뜨리려 하는 듯했다.

김여사님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망치질처럼 그녀의 심장 가장 깊은 곳, 돌처럼 굳어버렸다고 생각했던 감정의 봉인들을 깨뜨렸다. 현우. 살아있었다니. 그리고 그녀의 존재를 정의했던 상처들을 치유하는 재단에서 일하고 있다니. 그 의미는 엄청났고, 두려웠으며, 동시에 불가능할 만큼 놀랍고, 경이로운 희망이었다.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봄날 오후의 햇살은 더욱 강렬해지는 듯했다. 공중에서 춤추는 먼지들이 마치 작은 희망의 파편들처럼 반짝였다. 지은은 다시 사진을 보았다. 떨리는 엄지손가락으로 청년의 얼굴을 가만히 어루만졌다. 지난 25년은 영혼의 겨울이었다. 묵묵한 애도와 침묵의 시간이었다. 하지만 이제, 부드러운 봄바람이 실어다 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소식과 함께,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용기의 씨앗이 그녀의 가슴 깊은 곳에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한때 단조로웠던 세상은 눈부신 색채로 폭발하며, 그녀에게 마침내 감히 꿈꿀 수 없었던 미래를 받아들이라고 요구하는 듯했다. 오랫동안 애도했던 그림자를 마주하고, 그가 생생한 현실로 그녀 앞에 서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 예측할 수 없지만, 분명히 그녀를 유혹하는 길고 긴 여정이, 속삭이는 봄 하늘 아래 펼쳐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