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눈꽃이 내리던 날의 약속 – 제847화

차가운 병원 복도에 드리운 그림자는 지우의 모든 기력을 빨아들이는 듯했다. 소독약 냄새는 코끝을 찌르고, 저 멀리서 들려오는 기계음은 심장을 옥죄는 불규칙한 박동처럼 느껴졌다. 눈앞의 유리는 너무나 투명해서, 그 안에 갇힌 수아의 창백한 얼굴이 마치 만질 수 있을 것처럼 생생하게 보였다. 하지만 동시에, 그 유리가 세상의 모든 것을 가로막는 견고한 벽 같았다. 며칠 밤낮을 새워 흐려진 시야에는 어둠과 절망만이 가득했다. 의사의 무거운 한숨과 함께 흘러나왔던 ‘최선을 다했지만…’이라는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수아…”

지우의 입술에서 새어 나온 이름은 고통스러웠다. 그녀는 주저앉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눌렀다. 모든 것이 자신의 잘못인 것만 같았다. 그날, 그 순간, 조금만 더 주의했더라면. 조금만 더… 스스로를 향한 가혹한 질책이 심장을 후벼 팠다. 숨을 쉬는 것조차 버거웠다. 몸을 지탱하던 벽에 기대자, 차가운 냉기가 등골을 타고 올라왔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감은 눈꺼풀 안쪽으로 그날의 푸른 하늘과 눈부신 햇살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곧, 그 모든 것을 집어삼킨 혼돈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때였다. 복도의 끝에서 익숙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지우는 고개를 들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 발걸음은 멈추지 않고 정확히 그녀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그녀의 앞에 멈췄다.

“이지우.”

낮고 단단한 목소리. 민준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그녀의 심연 속으로 가라앉아 있던 감각들을 일깨웠다. 지우는 천천히 눈을 떴다. 피로에 지친 그녀의 시선은 민준의 굳건한 눈빛과 마주쳤다. 그의 눈빛 속에는 걱정과 슬픔, 그리고 무언가 단호한 결의가 담겨 있었다. 하지만 지우는 그에게서 위로를 받을 여유조차 없었다. 오히려 그의 존재가 그녀의 죄책감을 더욱 선명하게 만들었다.

“왜 왔어?” 지우의 목소리는 갈라지고 메말라 있었다. 힘없이 떨리는 손을 애써 감췄다.

“수아 때문에.” 민준은 미동도 없이 답했다. “네 옆에 있으려고.”

“내 옆에 있을 필요 없어. 이건 내 문제야.” 지우는 애써 차갑게 말했다. 그의 존재가 그녀에게 너무나 큰 부담이었다. 자신이 무너져 내리는 모습을 그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민준은 한숨을 쉬었다.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수아는 우리 모두의 문제야. 너 혼자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잖아.”

“내가 감당할게. 내가 다 책임질 거야. 그러니까, 너는…” 지우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예전의 자신들이 수아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그녀를 지키기 위해 어떤 약속을 했었는지, 그 모든 기억들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 약속은, 겨울 눈꽃이 흩날리던 날, 세상에서 가장 순수했던 미소를 지닌 어린 수아를 사이에 두고 함께 맹세했던, 그들의 모든 것이었다.

민준은 지우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감쌌다. 그의 손은 따뜻했지만, 지우는 그 온기를 거부했다. “손 놔.”

“지우야.” 민준은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손길은 더욱 단단해졌다. “그날을 기억해? 겨울 눈꽃이 처음으로 세상을 덮었던 날. 작은 수아가 눈밭에서 뛰놀다 넘어져 울음을 터뜨렸을 때, 우리가 두 손을 마주 잡고 약속했잖아. 어떤 일이 있어도 이 아이를 지켜주겠다고. 세상의 모든 고통으로부터 막아주겠다고.”

지우의 눈가에 뜨거운 눈물이 차올랐다. 그 약속은 그녀의 심장 가장 깊은 곳에 묻혀 있던 것이었다. 그 약속을 떠올리는 순간, 그녀의 오랜 상처가 다시 터져버리는 것 같았다. “그 약속… 내가 깼어. 내가 지키지 못했어…!” 그녀는 결국 눈물을 터뜨리며 몸을 떨었다. 억누르던 슬픔과 죄책감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민준은 그녀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지우는 저항하지 못했다. 그의 단단한 품은 그녀가 오랫동안 갈구해왔던 안식처였지만, 동시에 그녀를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다. “아니야. 아직 끝나지 않았어. 우리 아직 약속을 지킬 수 있어.” 민준의 목소리는 그녀의 머리 위에서 울렸다. 그의 심장 박동이 그녀의 귀에 생생하게 들려왔다.

그때, 중환자실 문이 열리고 주치의인 김 교수가 나왔다.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환자 보호자분들.”

지우와 민준은 동시에 그를 바라봤다. “수아는…?” 지우의 목소리는 다시 떨렸다.

김 교수는 안경을 고쳐 쓰며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밤이 고비입니다. 아직 의식은 돌아오지 않았고… 생체 신호가 불안정합니다. 지금으로서는… 다음 단계를 논의해야 할 것 같습니다.”

“다음 단계라니요?” 민준이 물었다.

“만약 오늘 밤을 무사히 넘긴다고 해도… 장기적인 회복을 위해서는 새로운 치료법을 고려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는 아직 임상 단계에 있는 위험 부담이 큰 방법입니다. 게다가… 막대한 비용이 따릅니다.” 김 교수의 시선이 지우에게 향했다. “보호자분께서 결정해주셔야 합니다.”

지우의 머릿속이 다시 복잡해졌다. 위험 부담이 큰 치료법. 막대한 비용. 그녀는 이미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손끝에서부터 절망감이 다시 기어 올라왔다.

“비용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민준의 목소리가 단호하게 울렸다. 지우는 놀라서 그를 올려다봤다. “어떤 치료든, 수아를 살릴 수 있다면 제가 모든 비용을 감당하겠습니다.”

김 교수가 살짝 눈썹을 올렸다. “하지만 이건 단순히 비용의 문제가 아닙니다. 환자분에게 발생할 수 있는 부작용과 그로 인한 후유증…”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이 있다면 해야 합니다.” 민준은 지우의 손을 꽉 잡았다. “지우야. 우리가 수아를 포기할 수는 없어. 기억나? 그날의 약속. 우리가 함께 지켜야 할 약속이야.”

지우의 눈에는 다시 눈물이 고였다. 그는 변함이 없었다. 그녀가 그를 밀어내고, 스스로를 고립시켰던 시간들 속에서도, 민준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수아를 향한, 그리고 어쩌면 그녀를 향한 그의 믿음은 흔들림이 없었다.

그 순간, 지우의 머릿속을 스치는 또 하나의 그림자가 있었다. 박준호. 민준의 야심만만한 사촌 동생. 그가 수아의 사고를 알고 어떤 식으로든 이 상황을 이용하려 할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하지만 지금은, 오직 수아의 생명만이 그녀의 모든 것이었다.

“선생님… 수아에게 정말 단 한 줄기의 희망이라도 있다면… 저는… 모든 것을 걸겠습니다.” 지우는 민준의 손을 마주 잡았다. 그의 온기가 그녀의 얼어붙은 손에 전달되었다. “어떤 부작용이 있더라도, 그 방법을 선택하겠습니다.”

민준은 지우의 결심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빛은 그녀의 어둠을 꿰뚫는 등대처럼 강렬했다. “함께 할 거야. 혼자 두지 않아. 우리의 약속, 이번에는 반드시 지킬 거야.”

두 사람의 시선이 교차했다. 그들의 약속은 이미 오래 전 겨울, 눈꽃이 내리던 날에 시작되었지만, 그 약속의 무게와 의미는 이 차가운 병원 복도에서 비로소 새로운 시작을 알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앞에는 여전히 예측할 수 없는 고통과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수아의 생명은 위태로웠고, 그들의 관계는 다시 봉합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그들은 함께였다. 그리고 그것이 전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