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은 깊었고, 창밖으로는 도시의 희미한 불빛들이 먼 별들처럼 드문드문 박혀 있었다. 민준은 습관처럼 따뜻한 차 한 잔을 앞에 두고 오래된 라디오의 주파수를 맞췄다. 지직거리는 작은 소음이 몇 번의 조정을 거치자, 이내 익숙하고 차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별이 빛나는 밤의 라디오” DJ, 해성이었다.
민준에게 이 라디오는 단순한 배경음악이 아니었다. 지난 7년, 그의 밤을 지탱해온 유일한 위안이자, 어쩌면 멈춰버린 시간을 다시 움직이게 할지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를 품게 하는 등대 같은 존재였다. 찻잔에서 피어나는 김처럼 아스라이 피어나는 옛 기억 속으로, 민준은 기꺼이 걸어 들어갔다.
“오늘 밤도 수많은 별똥별이 하늘을 가로지릅니다. 어떤 이에게는 소원이 되고, 어떤 이에게는 그저 스쳐 가는 빛이 되겠지요. 하지만 저마다의 밤하늘 아래,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빛나고 있습니다.” 해성 DJ의 목소리는 밤공기처럼 포근하면서도, 때로는 아련한 슬픔을 담고 있었다. 민준은 눈을 감았다. 그와 그녀의 어릴 적 비밀 아지트, 버드나무 아래 낡은 벤치에 앉아 함께 별을 헤던 밤들이 선명하게 재생되었다.
그녀, 지혜. 그 이름은 민준의 가슴속 가장 아프고도 아름다운 문장이었다. 갑작스럽게 사라진 지혜는 흔적조차 남기지 않았다. 그저 덩그러니 놓인 한 통의 편지에는 ‘미안해, 하지만 가야만 해. 잊지 않을게. 언젠가 다시 별이 빛나는 밤에…’라는 짧고 모호한 글귀만이 적혀 있었다. 그 후로 민준은 매일 밤 이 라디오를 들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녀가 남긴 암호가 아닐까 하는 실낱같은 희망을 부여잡고서.
해성 DJ는 잔잔한 음악을 한 곡 들려준 후, 조용히 다음 코너를 소개했다. “다음은, 한 통의 사연입니다. 익명으로 보내주신 편지네요. 오랜 친구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담겨있습니다.”
민준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사연이겠지, 생각했다. 그러나 DJ가 편지 내용을 읽어 내려가는 순간, 민준의 손에 든 찻잔이 미세하게 떨렸다.
“
‘…그 친구와 저는 어릴 적부터 이상한 습관이 하나 있었어요. 소중한 약속이나 비밀을 나눌 때면, 항상 저희만의 나무 아래에 작은 조약돌을 묻곤 했죠. 서로가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그 나무는 우리의 약속을 지켜줄 수호자라고 믿었어요. 그녀는 늘 말했죠. ‘세상의 모든 언어가 사라져도, 이 나무는 우리의 이야기를 기억할 거야. 그리고 언젠가, 가장 별이 빛나는 밤에, 그 이야기를 너에게 돌려줄 거야’라고요. 저는 아직도 그 나무를 찾아갑니다. 혹시 그녀가 남긴 또 다른 이야기가 있을까 해서… 혹시 그녀도 저처럼 그 나무를 기억하고 있을까요? 그때의 그 밤을…’
”
민준은 숨을 들이켰다. 가슴이 격렬하게 요동쳤다. ‘우리만의 나무’, ‘조약돌’, ‘별이 빛나는 밤’. 그 모든 단어들이 칼날처럼 심장을 꿰뚫었다. 지혜와 민준에게는 은행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오래된 학교 운동장 한편에 우뚝 서 있던 그 나무. 두 사람은 그 나무 아래에서 비밀을 속삭였고, 미래를 꿈꾸었고, 작은 조약돌에 서로의 이름을 새겨 묻곤 했다. 특히 지혜는 늘 말했다. “만약 우리가 멀리 떨어지게 되더라도, 이 나무는 우리의 비밀을 지켜줄 거야. 그리고 가장 별이 빛나는 밤에, 우리의 약속을 다시 상기시켜 줄 거야.”
민준은 라디오 볼륨을 높였다. 그의 귀에 사연을 보내온 사람의 이름은 들려오지 않았다. 익명. 그저 익명이라는 사실이 더욱 민준의 심장을 조여왔다. 사연 속의 그녀는 지혜인가? 아니면 그저 우연의 일치인가? 수많은 밤을 새워가며 희망과 절망 사이를 오갔던 지난 7년의 세월이 한순간에 민준의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DJ 해성의 차분한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참으로 아름다운 사연입니다. 그 나무가 두 분의 약속을 기억하고, 다시 만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기를 저도 바랍니다. 사연에 맞춰 이 곡을 띄워 드립니다. 이 밤, 모든 그리움이 닿기를 바라며…”
이어지는 곡조는 민준과 지혜가 가장 좋아했던 멜로디였다. 마치 누군가 민준의 마음을 들여다본 듯, 정확히 그의 추억을 저격하는 선곡이었다. 우연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조각들이 딱 맞아떨어지는 퍼즐 같았다. 민준의 심장은 쿵쾅거렸다. ‘설마… 설마 지혜인 걸까?’
그는 더 이상 차분히 앉아있을 수 없었다. 7년 동안 굳게 닫혔던 그의 마음속 문이 활짝 열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손안에 쥐고 있던 찻잔을 탁자에 내려놓고, 민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 밤, 그는 그 은행나무 아래로 가야만 했다. 그가 지난 세월 동안 수없이 찾아갔지만 아무것도 찾지 못했던 그곳. 하지만 오늘 밤은 달랐다. 라디오가, 이 별이 빛나는 밤이, 그에게 알 수 없는 메시지를 보내는 것 같았다.
두터운 외투를 걸치고, 낡은 운동화 끈을 꽉 조였다. 그의 손에 잡힌 열쇠 뭉치가 차가웠다. 머릿속에는 오직 그 은행나무의 모습만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어쩌면 그 나무 아래, 지혜가 남긴 새로운 조약돌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미약하지만 강력한 희망이 그를 이끌었다. 혹은, 어쩌면… 그곳에 지혜가 서 있을지도 모른다는 터무니없는 상상마저도.
캄캄한 골목을 가로지르고, 겨울바람이 차갑게 뺨을 스쳐 지나갔다. 그의 발걸음은 멈출 줄 몰랐다. 낡은 학교 교정은 불 꺼진 채 고요했지만, 저 멀리 그의 눈에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수십 년의 세월을 견뎌낸, 그들의 은행나무였다. 나무는 밤하늘의 별빛 아래에서 고독하게 서 있었다. 민준은 숨을 헐떡이며 나무 아래로 달려갔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나무줄기에 손을 짚었다. 차가운 나무껍질의 질감이 그의 손바닥에 생생하게 느껴졌다. 수없이 만져본 그 나무였다. 그는 무릎을 꿇고 주위를 살폈다. 땅은 얼어붙어 있었지만, 그의 눈은 작은 조약돌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흙을 헤치고, 낙엽을 쓸어내렸다. 그의 손끝에 닿은 것은 차가운 흙과 돌멩이들 뿐이었다. 실망감이 쓰나미처럼 밀려왔다. 결국 허무한 희망이었던 걸까.
고개를 떨구려는 순간, 그의 눈길이 나무뿌리 쪽에 박혀 있는 아주 작은, 이끼 낀 돌멩이 하나에 멈췄다. 너무나 작고 평범해서, 그동안 수없이 지나쳤을 법한 돌이었다. 민준은 떨리는 손으로 그 돌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돌멩이의 한 면에는 흐릿하게 새겨진 글자가 있었다. 흙먼지를 닦아내자, 희미하지만 분명하게 보이는 두 글자. ‘ㅈㅎ’.
지혜의 이니셜이었다. 민준의 심장이 다시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이니셜 아래, 거의 알아볼 수 없게 작게 새겨진 또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작은 별 모양의 문양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마치 누군가 의도적으로 표시해 둔 듯한 작은 화살표가 땅바닥을 향하고 있었다.
민준은 얼어붙은 땅을 바라봤다. 그 화살표가 가리키는 곳은, 나무뿌리 바로 옆, 수풀이 무성하게 자란 곳이었다. 손에 쥔 조약돌은 그의 손바닥에서 뜨겁게 달아오르는 듯했다. 7년 만에, 그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지혜가 남긴 또 다른 이야기가 비로소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그의 가슴속에는 알 수 없는 기대와 두려움이 뒤섞인 채, 다음 장을 향한 문이 서서히 열리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