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겨진 얼굴, 다시 피어날 시간
지훈은 셔터 소리가 멈춘 고요한 스튜디오에 앉아 있었다. 렌즈 너머로 세상을 바라보는 일만큼, 그 시선이 담아낸 시간을 되짚는 일은 언제나 가슴을 먹먹하게 했다. 특히 지난 몇 주간, 사진관을 덮쳐온 예기치 않은 진실들은 그의 마음속에 쉬이 가라앉지 않는 파문을 일으키고 있었다. 오래된 액자 속 빛바랜 가족사진들이 그를 묵묵히 응시하는 듯했다. 할아버지의 따뜻한 미소, 젊은 시절의 아버지… 그들의 눈빛이 어쩐지 오늘따라 더 아득하게 느껴졌다.
“사장님, 계세요?”
낮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지훈은 정신을 차렸다. 문을 열고 들어선 이는 김여사였다. 항상 정갈한 한복 차림에 온화한 미소를 띠는 김여사는 이 사진관의 오랜 단골이자, 어릴 적 지훈에게는 친할머니만큼이나 다정한 이웃이었다.
“어서 오세요, 김여사님. 무슨 일이세요?”
김여사는 지훈을 향해 옅게 웃으며 손에 든 낡은 봉투를 내밀었다. “오랜만에 이걸 좀 정리해 보려구요. 할아버지가 찍어주신 건데… 너무 오래돼서 알아보기도 힘들어졌네요.”
지훈이 조심스럽게 봉투를 받아들었다. 안에는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빛바랜 흑백사진 한 장이 들어있었다. 얇고 바스락거리는 종이 위에는 흐릿한 형체들이 희미하게 보일 뿐이었다. 그는 사진을 들어 조명 아래 비춰보았다. 젊은 남녀 한 쌍이 다정하게 어깨를 기댄 채 서 있었다. 배경은 한때 마을 어귀에 우뚝 서 있었으나 지금은 사라진, 거대한 느티나무 아래였다. 할아버지의 풍경화 속에 자주 등장했던 바로 그 나무였다.
사진 속 남자의 얼굴을 응시하던 지훈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묘한 기시감, 아니 그보다 더 깊은 어떤 이끌림이었다. 마치 거울을 보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젊은 시절의 할아버지인가? 아니, 할아버지의 젊은 모습과는 조금 다른, 어딘가 모르게 낯설면서도 익숙한 얼굴이었다.
“김여사님, 이분들은…” 지훈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김여사는 사진을 들여다보며 회상에 잠긴 듯 아련한 미소를 지었다. “아이고, 참… 그립네. 저 남자는… 사장님 아버지 친구분이었어요. 사장님 아버지와는 형제처럼 지내셨지. 참 좋은 사람이었는데… 갑자기 소식도 없이 사라져 버렸어.”
지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아버지의 친구? 그러나 아버지의 이야기에서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었다. 그가 아버지의 친구라고 하기엔 사진 속 남자의 얼굴은 너무나도 그 자신과 닮아 있었다. 심지어 눈매와 콧날은 물론, 입가에 어리는 희미한 미소까지도.
“사라졌다구요? 왜요?”
김여사의 표정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게… 좀 복잡한 사연이 있었지. 저 남자분과 저 아가씨가 결혼할 사이였는데, 무슨 일이 터져서 아가씨만 남겨두고 홀연히 떠났어. 그 아가씨가 마음고생이 심했지. 나중에 다른 남자와 결혼하긴 했지만, 첫사랑을 잊지 못해서 평생을 홀로 지내다시피 했어.”
지훈은 사진 속 여자의 얼굴을 다시 보았다. 흐릿하지만 앳된 얼굴에는 이루지 못한 사랑의 그림자가 일찌감치 드리워져 있었다. 그리고 다시 남자의 얼굴로 시선이 돌아왔을 때, 그는 확신했다. 이것은 단순한 우연의 일치가 아니었다. 그의 심장이 불안하게 울렁였다. 마치 오랜 시간 잊혔던 비밀의 문이 천천히 열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김여사님, 혹시… 저 남자분 성함이 어떻게 되셨는지 기억하세요?” 지훈의 목소리는 갈라져 나왔다. 오래된 사진 속에서 불길한 예감이 서서히 형체를 갖추고 있었다.
김여사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래, 기억나지. 이름이… 지훈 씨와 똑같았어. 김지훈.”
지훈의 손에서 사진이 스르륵 떨어졌다. 바닥에 떨어진 흑백사진 속에서, 이름마저 같은 젊은 남자가 자신과 똑같은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수십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오래된 사진관은 또 하나의 충격적인 진실을 세상에 드러내려 하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굳게 닫았던 시간의 문 뒤편에, 과연 어떤 이야기가 숨겨져 있었던 걸까. 그의 가슴은 격렬하게 요동쳤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