볕이 드는 창가에 앉아 있었다. 온몸으로 스며드는 가을 햇살은 따뜻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는 차가운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오래된 책갈피처럼 접혀 있던 기억 하나가 문득 펼쳐진 탓이었다. 희미해진 글씨를 따라가다 보면, 언제나 그곳에서 멈추는 지점이 있었다. 바로 그 애틋하고도 후회스러운 이별의 순간이었다.
그때였다. 창밖에서 들리던 익숙한 발소리가 이내 방문 앞에서 멈추는가 싶더니, 문이 살짝 열리고 하얀 털을 가진 설이 모습을 드러냈다. 길고양이답지 않게 도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세심한 이 고양이는, 내가 깊은 생각에 잠겨 있을 때면 언제나 이렇듯 소리 없이 다가왔다. 늘 그랬듯 아무 말 없이 방으로 들어선 설은, 미끄러지듯 내 옆으로 와 따뜻한 햇살 아래 몸을 웅크렸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작고 규칙적인 골골송은 거친 내 마음을 부드럽게 쓰다듬는 잔잔한 파도 같았다.
“설아.”
낮게 읊조린 내 목소리에 설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봤다. 비취색 눈동자에는 내가 미처 말하지 못한 감정들까지도 다 헤아리는 듯한 깊은 이해심이 담겨 있었다. 그 눈을 마주하면, 굳게 잠겨 있던 마음의 문이 조금씩 열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마치 오랜 친구에게 속삭이듯, 내 안의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오늘 문득 오래된 사진첩을 봤어. 그 사람 사진이 보이더라고. 벌써 그렇게나 많은 시간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그때의 기억들이 생생해. 특히 마지막 순간이….”
나는 말을 잇지 못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설은 나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가늘고 부드러운 털이 볼에 닿았다. 그 작은 온기만으로도 가슴을 짓누르던 먹구름이 조금은 흩어지는 기분이었다.
“내가 그때 좀 더 솔직했더라면, 좀 더 용기 내어 진심을 전했더라면… 어쩌면 모든 것이 달라졌을지도 몰라. 억지로 밀어내려 했던 내 마음이, 결국 돌이킬 수 없는 후회로 남았어.”
시간은 모든 것을 치유한다고 했던가. 하지만 어떤 상처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 깊게 파고드는 법이었다. 특히 관계에서 비롯된 후회는 좀처럼 아물지 않고, 지워지지 않는 낙인처럼 남아 이따금씩 나를 괴롭혔다. 그 사람과 나 사이에 놓였던 미묘한 감정의 장벽, 그리고 마지막 순간까지 그 벽을 허물지 못했던 비겁함이 늘 나를 따라다녔다.
설은 가만히 내 얼굴을 올려다봤다. 그 눈빛은 마치 “그때 그러지 못했던 이유가 있었을 거예요”라고 말하는 듯했다. 혹은 “지금 당신이 느끼는 아픔을 이해합니다”라고 위로하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설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고롱거리는 소리가 더욱 커졌다.
“너는 이해하지?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얼마나 복잡한지. 사랑하면서도 밀어내고, 붙잡고 싶으면서도 놓아버리는… 그런 모순투성이인 마음을.”
나는 설에게서 고개를 들고 창밖을 내다봤다. 붉게 물든 단풍잎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우수수 떨어지고 있었다. 저 나뭇잎들도 언젠가 떨어질 것을 알면서도 제 시간을 다 살다 가는 것일까. 나 역시 내 시간 속에서 최선을 다했지만, 그때는 그것이 최선인 줄 몰랐던 것일까.
설은 자리에서 일어나 내 무릎 위로 폴짝 뛰어올랐다. 그리고는 앞발로 내 팔을 꾹꾹 눌렀다. 마치 안마를 하듯 부드럽게, 하지만 단호하게. 그것은 나를 향한 설만의 특별한 대화 방식이었다. 나는 설의 행동에서 어떤 메시지를 읽어내려 애썼다. “스스로를 너무 탓하지 말아요” 혹은 “지나간 일은 어쩔 수 없어요. 중요한 건 지금이에요” 같은 위로의 말들이 귓가에 맴도는 듯했다.
설은 이내 나의 목덜미에 얼굴을 비볐다. 간지러우면서도 따뜻한 그 촉감에 나는 빙긋 미소 지었다. 어쩌면 설은 내가 그 사람에게 전하고 싶었던 그 따뜻한 마음을 대신 전해주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제야 나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천천히 내쉬었다. 가슴을 짓누르던 먹먹함이 조금씩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고마워, 설아. 네 덕분에 조금은 괜찮아진 것 같아.”
나는 설을 품에 안았다. 설은 나를 향해 작은 ‘먀옹’ 소리를 냈다. 마치 “천만에요, 친구”라고 화답하는 것 같았다. 그 순간, 길고양이 설이 내게 찾아온 지 벌써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수많은 계절이 바뀌고, 수많은 밤을 함께 지새웠다. 그리고 그 시간 속에서 설은 나에게 단순한 동물이 아니라,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되어주었다.
나는 설의 부드러운 털에 얼굴을 기댄 채 눈을 감았다. 과거의 후회는 여전히 내 안에 남아 있겠지만, 설과의 대화를 통해 그것을 대하는 나의 태도가 조금은 달라질 수 있음을 깨달았다. 아픔을 외면하기보다, 그것을 인정하고 어루만지는 것. 그리고 현재의 온기를 놓치지 않는 것. 설은 언제나 나에게 그런 조용하고도 깊은 가르침을 주곤 했다.
창밖의 햇살은 여전히 따뜻했고, 설의 골골송은 변함없이 잔잔했다. 어쩌면 그 사람과의 관계에서 얻지 못했던 위안과 이해를, 나는 이 작은 길고양이에게서 얻고 있는지도 모른다. 미련과 후회가 없는 삶은 없으리라. 중요한 것은 그 미련을 어떻게 현재로 가져와 더 나은 자신으로 만드는가 하는 것이리라. 나는 다시 한번 설을 꼭 안았다. 어둡던 마음 한구석에, 작은 희망의 불씨가 피어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다음 이야기는 아직 알 수 없지만, 설과 함께라면 그 어떤 길도 걸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