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가을 햇살이 골목의 한쪽 벽에 비스듬히 드리워져 있었다. 그 빛은 먼지가 자욱한 공기 속을 유영하며,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이진우는 허름한 양복 차림으로 그 골목 어귀에 서 있었다. 그의 손에는 닳아 해진, 거의 희미해진 흑백 사진 한 장이 들려 있었다. 사진 속에는 앳된 미소를 띤 소녀가, 그 골목 안쪽 어딘가에 있을 법한 낡은 상점의 문 앞에서 활짝 웃고 있었다.
849번째의 아침이었다. 셀 수 없이 많은 밤을 헤매고, 셀 수 없이 많은 단서를 쫓아왔다. 이제 그의 얼굴에는 지쳐 보이는 주름이 깊게 패여 있었지만, 그의 눈빛만은 촛불처럼 흔들림 없이 타오르고 있었다. 첫사랑, 은수. 그 이름 석 자는 그의 삶의 나침반이자, 영원히 도달할 수 없을지도 모르는 등대였다.
그는 사진 속 배경과 눈앞의 풍경을 번갈아 보았다. 시간은 모든 것을 바꿔놓았지만, 건물의 골격만큼은 여전히 어렴풋이 남아 있었다. 사진 속 소녀가 서 있던 자리는 이제 굳게 닫힌 낡은 목재 문으로 바뀌어 있었다. ‘정인 서점’이라는 글씨가 흐릿하게 새겨진 간판은 녹이 슬고 페인트가 벗겨져 있었다. 그의 기억 속 은수는 책을 좋아했다. 어릴 적, 낡은 동화책을 읽어주던 은수의 목소리는 아직도 그의 귓가에 맴도는 듯했다.
진우는 천천히 문을 향해 걸어갔다. 문고리를 잡으려던 순간, 옆집에서 누군가 인기척을 내며 문을 열었다. 퀴퀴한 한약 냄새와 함께 마른 기침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는 고개를 돌렸다. 낡은 한의원의 문턱에 기대어 선 노인이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백발이 성성하고 깊은 눈가의 주름이 세월의 무게를 말해주는 얼굴이었다.
“누구를 찾으시오?” 노인의 목소리는 마른 나뭇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 같았다.
진우는 허리를 숙여 인사한 후, 조심스럽게 사진을 내밀었다. “혹시 이 아이를 아십니까? 오래전 이 골목 어딘가에 살았다고 들었습니다. 이름은… 은수입니다.”
노인은 돋보기 안경을 찾아 쓰고 사진을 받아 들었다. 희미한 사진 속 소녀의 얼굴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던 노인의 눈빛에 미세한 파문이 일었다. 그의 손가락이 사진 위를 스쳤다.
“이 아이… 아, 기억나는군. 아주 오래전 이야기지만… 이 서점 문 앞에서 늘 혼자 앉아 책을 읽던 아이였지.” 노인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정인 서점 문 앞 의자에 앉아 해 질 녘까지 책을 읽곤 했어. 그렇게 조용하고 예쁜 아이는 처음 봤지. 마치 동화 속에서 튀어나온 아이 같았어. 아픈 엄마를 둔 착한 아이였지.”
진우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 같았다. ‘아픈 엄마’라는 단어. 그가 미처 알지 못했던 은수의 과거 조각이 비로소 제자리를 찾는 듯했다. 그의 기억 속 은수는 언제나 밝고 강인했지만, 어린 은수가 홀로 감당했을 아픔은 얼마나 컸을까. 그는 목이 메어왔다. “그 아이가… 그 후로 어떻게 되었는지 아십니까?”
노인은 다시 사진을 진우에게 돌려주며 먼 곳을 응시했다.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지. 이 서점 주인도 같이… 그 아이 엄마가 돌아가시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어. 아팠던 몸으로 오래 버티지 못하셨지. 그 후에 고아가 된 은수를 서점 주인이 맡았다고 했는데… 몇 달 후, 서점 문이 닫히고 둘 다 떠나버렸어. 그 후로는 한 번도 보지 못했지. 가끔 서점 문 앞에서 멍하니 서 있던 은수의 뒷모습이 눈에 밟히곤 했어. 어딘가로 입양을 갔다는 소문도 있었고….”
진우는 사진을 든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느꼈다. 입양. 그동안 추적해오던 단서 중 하나였다. 은수의 삶에 이렇게 깊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을 줄이야. 그의 기억 속 은수는 늘 환하고 따뜻한 사람이었기에, 그의 심장은 미어져 오는 고통을 느꼈다. 자신이 알지 못했던 은수의 외로움과 슬픔이 그를 짓눌렀다.
“혹시, 그 서점 주인의 이름을 아십니까? 혹은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에 대한 단서라도….” 진우는 간절하게 물었다.
노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래전 일이라 이름까지는 기억나지 않아. 그리고 그들도 이 골목 사람들과는 잘 어울리지 않았어. 조용하고 과묵한 사람들이었지. 다만… 그 서점 주인이 종종 들고 다니던 오래된 가방이 하나 있었는데… 특이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어. 매화꽃 문양이었지.”
매화꽃 문양. 진우는 이 단어를 듣는 순간, 전신에 전율이 흘렀다. 몇 년 전, 그가 우연히 발견했던 낡은 수첩에 희미하게 눌린 자국으로 남아있던 그림. 그것은 분명 매화꽃 문양이었다. 당시에는 단순히 아름다운 그림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에 와서야 비로소 연결고리를 찾은 것이다.
진우는 노인에게 연신 감사 인사를 전하고 골목을 벗어났다. 그의 발걸음은 더 이상 방황하지 않았다. 마음속에 새로운 퍼즐 조각이 맞춰진 듯, 그의 시야는 한결 선명해졌다. 어린 시절 은수의 그림자, 그녀의 아픔, 그리고 그녀를 보듬었던 누군가의 존재. 이 모든 것이 마치 낡은 실타래처럼 엉켜 있었던 것을, 이제야 비로소 한 올 한 올 풀어낼 실마리를 찾은 기분이었다.
차가운 가을바람이 그의 뺨을 스쳤다. 석양은 붉게 타오르며 골목 끝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그의 손에 들린 사진 속 은수는 여전히 활짝 웃고 있었다. 진우는 그 웃음 속에서 알지 못했던 슬픔을 발견했지만, 동시에 그 모든 슬픔을 넘어선 강한 의지를 보았다. 849번째의 긴 여정 끝에, 그는 비로소 한 발자국 더 은수에게 다가선 기분이었다. 매화꽃 문양. 그 실마리가 그를 어디로 이끌지는 알 수 없었지만, 진우는 알고 있었다. 그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잃어버린 첫사랑을 찾기 위한 그의 탐정은, 이제 또 다른 장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