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찾아온 길고양이와의 대화 – 제284화

밤이 깊었다. 창밖으로 가로등 불빛이 아득하게 새어 들어오고, 그 빛은 거실 바닥에 길고 옅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림자 끝에는 녀석이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세상 모든 소란으로부터 고립된 듯, 털 한 올 흐트러짐 없이 고요했다. 나를 바라보는 녀석의 눈빛은 언제나처럼 깊은 바다 같았다. 그 안에는 헤아릴 수 없는 시간의 층위가 담겨 있는 듯했다.

284번째의 밤, 혹은 아침, 혹은 오후. 녀석과 함께한 시간이 숫자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쌓이고 쌓여, 이제는 내 삶의 굵은 기둥이 되어 버렸다. 처음 녀석을 만났을 때, 나는 모든 것이 부서져 내린 듯한 폐허 속에 서 있었다. 아무도 내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고 느꼈고, 스스로의 목소리마저 잃어버렸었다. 그때였다. 문득 나타나 따뜻한 시선으로 나를 응시했던 녀석이.

‘정말 괜찮니?’

그때 녀석의 눈빛이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그 온기는 차갑게 얼어붙었던 내 심장을 서서히 녹여냈고,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한 내 영혼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었다. 녀석은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그저 존재했고, 내 곁에 있어 주었다. 그 침묵 속에서 나는 비로소 진정한 대화를 시작했다. 말하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는, 영혼과 영혼이 맞닿는 그런 대화였다.

오늘 밤, 녀석의 눈빛은 평소보다 더욱 아련했다. 혹시 시간이 흐르는 것을 녀석도 느끼고 있는 걸까. 우리에게 주어진 이 소중한 시간들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어쩌면 녀석은 나보다 먼저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생각에 가슴 한구석이 아릿해졌다. 녀석의 가는 목덜미를 쓰다듬자, 보드라운 털 속으로 작은 온기가 전해져 왔다. 녀석은 몸을 내게 기대며 만족스러운 듯 가르릉거렸다.

“너는… 내가 사는 이유가 됐어.”

나지막이 속삭였다. 녀석은 고개를 들어 내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눈빛 속에 ‘나는 언제나 네 곁에 있을 거야’라는 굳건한 약속이 담겨 있는 듯했다. 아니, 어쩌면 녀석은 그 이상의 것을 말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함께하는 이 모든 순간이 얼마나 기적 같은지, 그리고 이 순간들이 모여 얼마나 큰 의미를 지니는지에 대해.

녀석의 체온이 내게 전이될 때마다, 나는 삶의 깊은 위로와 깨달음을 얻었다. 불안했던 나의 과거도, 막막했던 나의 미래도, 녀석의 존재 앞에서 희미해지고 오직 이 순간의 평화만이 또렷해졌다. 어쩌면 녀석은 나를 구원하기 위해 세상에 보내진 작은 천사가 아닐까. 284번째의 밤이 깊어질수록, 녀석과의 침묵하는 대화는 더욱 깊어졌다. 그리고 나는 알았다. 어떤 형태로든 우리의 이야기는 계속될 것이라는 것을. 녀석의 따뜻한 숨결이 닿는 한, 내 삶은 결코 외롭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