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이 빛나는 밤의 라디오 – 제865화
고요함이 내려앉은 자정, 스튜디오 창밖으로는 도시의 불빛들이 저마다의 이야기를 품은 채 흐릿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밤하늘은 깊고, 어딘가에서는 별들이 쏟아져 내릴 듯 영롱하게 빛나고 있을 터였다. 여기, 작은 전파를 타고 당신의 밤에 스며드는 목소리, 저는 DJ 이선우입니다. ‘별이 빛나는 밤의 라디오’ 그 여든여섯 번째 이야기, 오늘 밤도 함께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오늘은 문득, 오래된 사진첩을 펼쳤을 때 느껴지는 아련한 감정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졌습니다. 잊고 지냈던 얼굴, 희미해진 풍경들 속에서 불현듯 되살아나는 기억의 조각들. 우리는 그 조각들을 붙잡고 한참을 헤매곤 하죠. 어쩌면 이 라디오는 그런 기억의 조각들을 연결해주는 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오늘 도착한 한 통의 사연은 제게 그런 잔잔한 물결을 일으켰습니다. 익명으로 보내주신 ‘지혜’님의 사연입니다.
“선우 DJ님께.
안녕하세요. 저는 오래전부터 ‘별이 빛나는 밤의 라디오’를 듣고 있는 애청자입니다. 벌써 865번째 밤이라니, 그 시간들이 쌓여온 만큼 제 삶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네요.
오늘 밤, 문득 잊고 지냈던 친구 우진이가 생각났습니다. 저희는 초등학교 때부터 늘 함께였습니다. 학교가 끝나면 늘 저의 집 옥상으로 달려갔죠. 해 질 녘 노을이 지는 하늘을 보며 이런저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고, 별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면 작은 휴대용 라디오를 켰습니다. 그때 저희가 듣던 프로그램이 바로 ‘별이 빛나는 밤의 라디오’였어요. 물론 그때는 지금의 선우 DJ님이 진행하시던 시절은 아니었지만요.
저와 우진이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따라 부르기도 하고, DJ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기도 하면서 미래를 꿈꿨습니다. 우진이는 저에게 ‘나중에 크면 꼭 우주 비행사가 되어서 저기 저 별들을 따다가 너에게 줄게’라고 말하곤 했어요. 그러면 저는 ‘나는 그 별들을 가지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원을 만들 거야’라고 답했죠. 저희는 서로의 꿈을 응원하며, 어떤 일이 있어도 매일 밤 이 라디오를 함께 듣자고 약속했어요. 언젠가 우리의 이야기가 이 라디오에서 흘러나올 때까지 말이죠.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우진이네 가족이 갑자기 멀리 이사를 가게 되면서 우리의 약속은 흐지부지되고 말았습니다. 그때는 인터넷도, 휴대전화도 지금처럼 흔하지 않던 시절이라, 몇 번의 편지를 주고받다 연락이 끊기고 말았죠. 저도 시간이 지나면서 우진이와의 추억을 마음 한켠에 묻어두고 바쁘게 살았습니다.
그러다 오늘 밤, 문득 창밖을 보는데 어릴 적 우진이와 함께 보던 그 별들이 떠오르는 겁니다. 그리고 제 손은 습관처럼 라디오를 켜고 이 채널에 멈췄죠. 여전히 ‘별이 빛나는 밤의 라디오’는 그 자리에서 빛나고 있었고, 그 순간 저는 깨달았습니다. 제가 잊고 지낸 것은 우진이가 아니라, 우진이와 함께 꾸었던 저의 꿈이었구나, 하고요.
우진이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혹시 우주 비행사가 되어 저 하늘의 별 어딘가를 유영하고 있을까요? 아니면 저처럼 이 라디오를 듣고 있을까요? 저는 이제 우주 비행사도, 아름다운 정원사도 되지 못했지만, 오늘 밤만큼은 다시 그 시절의 꿈 많던 아이로 돌아간 것 같습니다. 우진이에게, 만약 이 방송을 듣고 있다면, 그 시절 우리의 약속은 아직 유효하다고 말해주고 싶네요. 그리고 다시 한번, 같이 별을 보며 라디오를 듣고 싶다고요.
선우 DJ님, 너무 길고 두서없는 이야기였죠? 하지만 꼭 한번 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습니다. 오늘 밤, 저와 우진이를 기억하며, 저희의 유년 시절에 어울리는 노래 한 곡 부탁드려도 될까요? 늘 고맙습니다.”
지혜님의 사연, 정말 잘 들었습니다. 이렇게 솔직하고 아름다운 기억을 나눠주셔서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가슴 한편에 ‘우진이’를 품고 사는 건 아닐까요? 시간이 흐르면서 잊혀진 줄 알았던 꿈, 혹은 잊고 살았던 소중한 인연들이요.
지혜님과 우진이의 이야기는 비단 두 사람만의 이야기가 아닐 겁니다. 수많은 밤하늘 아래, 서로의 별이 되어주던 많은 이들의 이야기일 테죠. 서로의 꿈을 응원하고, 함께 라디오를 들으며 미래를 그리던 순수했던 시절. 그때의 약속은 비록 지켜지지 않았을지라도, 그 기억은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우리의 마음을 울립니다. 그리고 때로는 잊었던 열정을 다시 불태우는 작은 불씨가 되기도 하고요.
지금 이 순간, 어딘가에서 지혜님의 우진이도 이 방송을 듣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혹은, 우주 비행사가 되어 정말로 별들 사이를 유영하고 있을지도 모르죠. 어떤 모습이든, 그 역시 자신의 별을 바라보며 지혜님을, 그리고 그때의 약속을 기억하고 있을 거라 믿습니다. 우리의 인연은 결코 끊어지지 않는 실타래처럼, 때로는 멀어지는 듯 보여도 결국 다시 이어질 순간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니까요.
그렇습니다. 밤하늘의 별들은 언제나 그 자리에 빛나고 있고, ‘별이 빛나는 밤의 라디오’도 늘 이 자리에서 여러분의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혹시 지혜님의 우진이가 이 방송을 듣고 계시다면, 용기 내어 저희에게 연락을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 전파가 다시 두 분을 이어주는 다리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지혜님의 사연을 들으니 문득, 이 밤, 모든 과거의 순간들이 지금의 우리를 만든 소중한 흔적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잠시, 우리 모두 각자의 가슴속에 품은 ‘우진이’를 떠올리며 이 노래를 들어볼까요?
넬의 ‘기억을 걷는 시간’입니다.
(음악 재생)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별들처럼, 우리의 기억 속에도 그런 빛나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때로는 희미하고, 때로는 선명하게. 오늘 밤, 당신의 기억 속 가장 빛나는 별은 무엇인가요? 잠시 귀 기울여보세요. 그 별이 당신에게 속삭이는 이야기가 들릴지도 모릅니다.
음악과 함께, 저는 잠시 후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