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사진관에서 생긴 일 – 제286화

흐릿한 기억의 심연

지훈은 낡은 나무 문을 열고 사진관 안으로 들어섰다. 쨍한 여름 햇살이 한풀 꺾인 오후였지만, 사진관 안은 여전히 아늑한 어둠과 퀴퀴한 종이 냄새로 가득했다. 김 사장님은 빛바랜 필름 통을 정리하며 돋보기 너머로 지훈을 맞았다. 그의 무표정한 얼굴에는 세월의 흔적이 깊게 패어 있었지만, 그 눈빛만큼은 언제나 흔들림 없이 날카로웠다.

“오랜만이군. 무슨 일인가?”

지훈은 말없이 품 안에서 오래된 사진첩 하나를 꺼내 테이블 위에 조심스럽게 올려놓았다. 겉표지가 너덜너덜해진, 손때 묻은 앨범이었다. 김 사장님은 앨범을 받아 들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이미 지훈이 십 년 넘게 찾아 헤매는 ‘그 사진’에 대해 알고 있었다. 사라진 누나, 수현. 지훈의 삶을 지배하는 유일한 미스터리였다.

“이번엔…… 뭘 발견했나?”

김 사장님의 목소리에는 미묘한 떨림이 섞여 있었다. 지훈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지난 몇 년간, 그는 수많은 사진과 단서를 들고 이 사진관을 찾아왔었다. 그때마다 김 사장님은 묵묵히 필름을 현상해주거나, 빛바랜 사진 속 인물을 확대해 주며 그의 희망과 절망을 곁에서 지켜봐 주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명확한 답을 준 적은 없었다. 어쩌면 답은 처음부터 지훈의 기억 속에, 혹은 그의 외면 속에 숨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지훈은 김 사장님이 앨범을 넘기는 것을 숨죽여 바라보았다. 학예회에서 어설프게 웃는 어린 지훈, 바닷가에서 모래성을 쌓는 수현, 가족여행에서 찍은 단체 사진들. 시간의 흐름을 고스란히 담은 사진들은 빛바랜 색깔만큼이나 아련한 추억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다 김 사장님의 손가락이 멈춘 곳은 앨범의 가장 뒤편에 붙어 있던 작은 사진 한 장이었다. 다른 사진들과 달리 모서리가 심하게 훼손되어 있었고, 표면은 거친 종이에 긁힌 듯 희미했다. 사진 속에는 낡은 우물가에 서 있는 한 여인의 옆모습이 담겨 있었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카락, 살짝 기울어진 고개, 그리고 아련하게 미소 짓는 입매. 그것은 지훈이 평생을 찾아 헤맨, 어린 시절의 누나 수현과 너무나도 흡사한 모습이었다.

지훈의 심장이 격렬하게 뛰었다. 그는 이 사진을 전에 본 적이 없었다. 마치 잊고 있던 기억의 파편이 불현듯 떠오른 듯했다. 하지만 동시에, 기시감과 함께 알 수 없는 불안감이 그의 목을 조여왔다. 김 사장님은 말없이 사진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 사진, 자네가 가진 ‘그 사진’과 어딘가 비슷하면서도… 다르군.”

지훈이 애타게 찾아다녔던 ‘그 사진’은 낡은 사진관 한구석에서 우연히 발견된, 누군지도 알 수 없는 여인의 초상이었다. 하지만 지훈은 그 사진 속 여인이 사라진 누나 수현이라고 굳게 믿어왔었다. 수현이 남긴 유일한 단서라고 생각하며, 그는 그 사진 한 장으로 수많은 밤을 지새웠다.

김 사장님은 돋보기를 들어 앨범 속 사진을 확대했다. 지훈은 숨을 멈췄다. 희미하게 보이지만, 사진 속 여인의 손에는 낡은 은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그리고 우물가 뒤편으로 보이는 희미한 풍경, 그것은 분명 지훈의 고향과는 다른 이국적인 느낌을 자아내고 있었다.

“이 여인은… 수현이가 아닐세.”

김 사장님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사진관의 정적을 갈랐다. 지훈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믿을 수 없다는 듯 그의 눈빛이 흔들렸다. 십 년이 넘도록 품어온 희망이 한순간에 산산조각 나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아니… 그럴 리가 없습니다. 분명… 누나입니다. 제 눈에는 누나로 보이는데…”

지훈의 목소리가 떨렸다. 김 사장님은 앨범 속 사진과, 지훈이 예전에 맡겼던 ‘그 사진’을 나란히 놓았다. 두 사진 속 여인은 너무나도 닮아 있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미묘하게 다른 표정, 다른 옷차림, 그리고 결정적으로 다른 배경이 눈에 들어왔다.

“닮았지. 하지만 이 여인은… 수현이 아니야. 그리고 자네가 찾아 헤맨 ‘그 사진’ 속 여인도, 어쩌면 수현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 적 없나?”

김 사장님의 말은 비수가 되어 지훈의 심장을 꿰뚫었다. 그의 눈앞에서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 듯했다. 십 년 넘게 쫓아온 그림자가, 사실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허상이었다는 말인가? 아니면 누군가 의도적으로 그에게 심어놓은 착각이었을까?

혼란스러운 지훈의 시선이 앨범 속 우물가 여인의 희미한 손에 박힌 은반지로 향했다. 그리고 그 순간, 마치 번개라도 맞은 듯 그의 머릿속을 스치는 한 줄기 기억이 있었다. 아주 오래전, 어린 수현이 몰래 간직했던, 할머니의 낡은 은반지. 하지만 사진 속 여인의 반지는 수현의 것과는 다른 무늬를 가지고 있었다.

지훈은 앨범 속 사진을 움켜쥐었다. 잊고 있던 고통스러운 진실이 그의 기억 속에서 서서히 고개를 들고 있었다. 어쩌면, 그는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길을 걷지 못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처음부터 다시 시작되어야 했다. 이 오래된 사진관이 그에게 던져준 또 하나의 질문 앞에서, 지훈은 깊은 심연 속으로 빠져들었다. 과연 그의 누나 수현은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 그는 누구를, 무엇을 찾아 헤맨 것일까?

김 사장님은 그런 지훈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다시 빛바랜 필름 통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사진관 안은 다시 묵직한 침묵에 잠겼고, 오직 지훈의 흐트러진 호흡만이 그 침묵을 깨고 있었다. 그의 손에 들린 사진은, 더 이상 희망의 증거가 아닌, 거대한 미로의 입구처럼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