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찾아온 길고양이와의 대화 – 제288화

그날 저녁, 지영은 창가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옅은 노을빛이 유리창 너머로 스며들어 방 안을 오렌지색으로 물들이는 시간이었다. 손에 들린 낡은 사진 한 장이 빛바랜 추억처럼 그녀의 눈빛 속으로 스며들었다. 젊은 날의 자신이 활짝 웃고 있는 모습, 그리고 그 옆엔 이제는 잡을 수 없는 손이 포개져 있었다.

긴 한숨이 창밖으로 흘러나갔다. 지난 몇 주간, 그녀를 짓눌러온 답답함이 사진 속의 미소와 너무나 대비되었다. 이루지 못한 꿈, 붙잡지 못한 인연, 그리고 그 모든 순간들이 남긴 후회라는 그림자가 그녀의 마음을 에워싸고 있었다. 서른이 훌쩍 넘어버린 지금, 그녀는 과연 무엇을 위해 달려왔고, 무엇을 놓쳤는지 자문했다.

그때였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온기가 다리께를 스치는 것이. 지영이 시선을 내리자, 별이가 그녀의 무릎에 살포시 턱을 괴고 앉아 있었다. 길고양이였지만, 어느 날 문득 찾아와 지영의 삶에 스며든 이후, 별이는 그녀의 가장 오랜 친구이자 침묵의 증인이 되어주었다. 별이의 크고 맑은 눈동자가 노을빛을 머금고 지영을 올려다보았다. 마치 그녀의 복잡한 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한 깊은 눈이었다.

“별아, 너무 늦어버린 걸까?” 지영이 나직이 속삭였다. 그녀의 목소리는 파스스 부서지는 낙엽처럼 힘없이 흩어졌다. “다시 시작하기엔, 너무 많은 시간이 흘렀고… 용기도 없는 것 같아.”

별이는 대답 대신, 지영의 손을 핥아주었다. 거친 듯 부드러운 혀의 감촉이 마음에 작은 파문을 일으켰다. 이내 녀석은 지영의 무릎 위로 폴짝 뛰어올라와, 그녀의 품에 파고들었다. 묵직하고 따뜻한 온기가 지영의 어깨에 고스란히 전해졌다. 조용하고 규칙적인 별이의 골골송이 고요한 방 안에 잔잔히 울려 퍼졌다.

지영은 별이의 부드러운 털을 쓰다듬었다. 어둠이 짙어지는 바깥 풍경과는 달리, 별이의 존재는 그녀의 마음속에 작은 등불을 켜주는 듯했다.

‘늦은 건 없어, 지영아.’

마치 별이가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별이의 체온과 심장 소리가 바로 곁에서 느껴졌다. 후회와 미련으로 가득했던 마음속에, 별이의 존재가 그려내는 따뜻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길가에서 헤매던 작은 생명이었던 별이는, 한때 자신도 그랬듯이 삶의 우여곡절 속에서 자신만의 길을 찾아온 존재였다. 별이는 지영에게, 모든 순간이 새로운 시작일 수 있음을,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여기, 현재에 발을 딛고 서는 것임을 온몸으로 말해주고 있었다.

‘두려워 말고, 네 마음이 이끄는 대로 다시 한번 걸어봐.’

지영은 천천히 눈을 떴다. 창밖은 이미 완전히 어둠에 잠겨 별들이 총총히 빛나고 있었다. 별이의 눈빛은 여전히 그녀를 향해 있었고, 그 속에는 따뜻한 격려와 변치 않는 믿음이 담겨 있었다. 낡은 사진 속의 미소는 이제 과거의 것이었지만, 새로운 미소를 지을 수 있는 현재는 지금 이 순간 그녀의 앞에 놓여 있었다. 별이와 함께.
지영은 별이를 더 꼭 안았다. 녀석의 털에 얼굴을 기댄 채, 오랜만에 마음 깊이 울려 퍼지는 희미한 희망의 목소리에 귀 기울였다. 어쩌면 아직 늦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아주 작은 발걸음이라도, 다시 한번 내디딜 용기가 생길지도 모른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