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회랑,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한 고요한 서고는 세라에게 늘 묘한 위안과 절망을 동시에 안겨주었다. 수천, 수만 년의 시간을 품은 고서들이 먼지 쌓인 책장 가득 메워져 있었지만, 그 모든 활자 속에서도 그녀 자신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지난 수백 화 동안, 그녀는 수많은 시대를 떠돌며 단 하나의 조각이라도 찾아 헤맸다. 하지만 매번 손에 닿는 것은 차가운 허무뿐이었다.
오늘도 세라는 희미한 등불 아래, 고대 언어로 쓰인 두루마리 하나를 조심스럽게 펼쳤다. 손끝이 파피루스의 거친 질감을 스쳤다. 눈은 피로에 절어 있었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이 안에, 어딘가에, 잃어버린 조각이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한 줄기 희망이 그녀를 움직였다. 겹겹이 쌓인 과거의 잔해 속에서 그녀는 자신이 누구였는지, 왜 이토록 기나긴 시간 동안 방황해야 하는지 알아내야 했다.
그때였다. 낡은 책장 구석, 여태껏 아무도 발견하지 못한 듯한 작은 틈새에서 희미한 빛이 깜빡였다. 세라의 심장이 불현듯 조여 왔다. 직감이었다.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위협과 절망의 순간들을 겪으며 단련된 그녀의 본능이, 이곳에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음을 속삭였다.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틈새를 더 벌리자, 그 안에서 낡고 해진 나무 상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먼지에 뒤덮였지만, 섬세한 조각 문양이 예사롭지 않았다.
상자를 여는 순간, 삐걱이는 소리가 정적을 갈랐다. 안에는 아무것도 없는 듯했다. 실망감이 밀려오려는 찰나, 그녀의 손이 상자 바닥에 닿는 순간, 차가운 금속성 촉감이 느껴졌다. 손가락으로 더듬어 꺼내보니, 그것은 작은 펜던트였다. 은은한 광택을 띠는 백금에 묘한 기하학적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중앙에는 푸른 빛을 발하는 작은 수정이 박혀 있었는데, 그 빛은 마치 밤하늘의 별처럼 깊고 아련했다.
세라가 펜던트를 손에 쥐자마자, 수정에서 뿜어져 나오던 푸른 빛이 갑자기 강렬해지더니, 그녀의 손목을 감싸는 빛의 파동으로 변했다. 그리고, 동시에, 거대한 폭풍처럼 기억의 파편들이 그녀의 의식을 강타했다.
혼돈 속의 조각들
차갑고 날카로운 기계음. 섬광. 그리고 귓가를 찢을 듯한 절규. 이안!
그 이름이 입술 밖으로 터져 나오기도 전에, 수많은 영상들이 그녀의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푸른 행성의 드넓은 초원, 은하를 가로지르는 우주선, 그리고… 다정한 눈빛을 가진 한 남자. 그의 미소, 그의 손길, 그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느껴졌다. “세라, 어떤 위험이 닥쳐도, 우리는 다시 만날 거야.”
그의 목소리가 들리자, 텅 비어 있던 가슴 한구석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으로 채워졌다. 그녀는 그를 기억하지 못했다. 단 한 번도. 하지만 이 순간, 그의 존재가 그녀의 모든 세포에 새겨진 듯한 전율을 느끼고 있었다.
영상은 급작스럽게 전환되었다. 격렬한 우주 전투, 산산조각 나는 함선, 그리고 그녀와 이안이 필사적으로 탈출 포드를 향해 달려가는 모습. 그때, 거대한 폭발이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이안이 그녀를 탈출 포드 안으로 밀어 넣으며 외쳤다. “기억을 잃어도 괜찮아, 세라! 이 펜던트가 널 인도할 거야. 나를… 찾아줘…”
그의 손에서 펜던트가 떨어져 그녀의 품으로 날아들었고, 동시에 탈출 포드의 문이 닫혔다. 유리창 너머로, 폭발의 불길 속에서 사라져가는 그의 마지막 모습을 보았다. 그의 얼굴은 절망으로 일그러져 있었지만, 눈빛만은 그녀에게 무한한 사랑과 믿음을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모든 것이 암전.
세라는 숨을 헐떡였다. 주저앉은 그녀의 손에서 펜던트가 떨어져 서고 바닥을 굴렀다. 눈물과 콧물이 뒤섞여 흐르고 있었다. 수백 화 동안 찾아 헤매던 기억의 파편이, 이렇게 잔인하고도 아름다운 모습으로 자신에게 돌아올 줄은 몰랐다. 잊고 있던 사랑. 잊고 있던 약속. 잊고 있던 고통.
그녀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이안. 이안. 이안. 이름이 비명처럼 목구멍을 타고 흘러나왔다. 이 모든 방황의 시작에는 그가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미래에도 그가 있어야만 했다. 이제 그녀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았다. 시간의 미아가 아니었다. 잃어버린 연인을 찾아 헤매는 시간 여행자였다. 그리고 그녀에게는 임무가 있었다. 그를 찾아야 했다. 어떤 시간이 걸리더라도.
펜던트의 푸른 빛은 아직 희미하게 깜빡이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장신구가 아니었다. 이안이 그녀에게 남긴 마지막 희망이자, 그들의 연결 고리였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펜던트를 다시 움켜쥐었다. 차가운 금속에서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는 듯했다. 그녀의 눈빛은 더 이상 방황하지 않았다. 슬픔과 동시에 강렬한 결의가 깃들어 있었다.
잃어버린 시간 속에서, 그녀는 드디어 자신의 나침반을 찾았다. 이제, 세라는 더 이상 길을 헤매지 않을 것이다. 이안에게로 향하는 길은 멀고 험난하겠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855화의 밤은 깊어지고 있었지만, 세라의 여정은 이제 막 진정한 시작을 알리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