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은 온통 하얀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소리 없이 내리는 눈발은 세상의 모든 소음을 집어삼키는 듯했고, 병실 안의 무채색 풍경과는 극명한 대비를 이루며, 지우의 마음을 더욱 시리게 만들었다.
침대에 기댄 은선은 아무런 미동도 없이 그저 창밖을 응시할 뿐이었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아무런 빛도 담겨 있지 않았다. 마치 모든 것이 지워진 듯한 공허함, 텅 빈 공간만이 그녀의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빛 속에 자리하고 있었다. 지난 몇 달간, 은선은 서서히 그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어제, 오늘, 그리고 한 시간 전의 기억조차 희미해지는 안개 속을 헤매는 사람처럼, 그녀는 지우가 아는 은선이 아니었다.
지우는 의자에 앉아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눈가에는 깊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지만, 그녀를 향한 시선만큼은 흔들림 없는 강인함과 애틋함으로 가득했다. 그의 손에는 낡은 종이 한 장이 들려 있었다. 오래된 사진, 정확히는 빛바랜 흑백 사진이었다. 어린 시절의 은선과 지우가 해맑게 웃으며 눈밭에 서 있는 모습. 사진 속 어린 지우는 장난스럽게 은선의 코에 눈을 묻히고 있고, 은선은 까르르 웃으며 그를 밀어내고 있었다. 그 순간, 눈밭 위에 피어난 두 아이의 웃음은 세상의 어떤 눈꽃보다도 찬란했다.
그 겨울, 새하얀 눈밭 위에서, 우리는 작은 손을 마주 잡고 맹세했었지. 어떤 시련이 닥쳐와도, 이 눈꽃처럼 맑고 순수한 마음을 잃지 않고 서로를 기억하겠노라고. 길을 잃어도, 이 약속의 빛을 따라 다시 만나겠노라고. 어린아이의 맹세였지만, 그 약속은 두 사람의 삶을 관통하는 거대한 축이 되었다. 수많은 겨울이 지나고, 수많은 눈꽃이 내렸지만, 그날의 약속만큼은 언제나 지우의 가슴속에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 약속은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은선아…”
지우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은선은 반응이 없었다. 그녀는 여전히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 공간에 홀로 남겨진 듯이, 이 세상과의 모든 연결 고리가 끊어진 것처럼 보였다. 지우는 아려오는 가슴을 억누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조용히 그녀의 옆으로 다가가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는 그녀의 차가운 손을 조심스럽게 감쌌다. 그의 온기가 그녀에게 닿기를, 그래서 얼어붙은 그녀의 세상에 작은 균열이라도 만들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녀의 손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마치 그 안의 모든 생명력이 빠져나간 듯했다.
“기억나? 그날 우리가 만들었던 눈사람… 코가 너무 길어서 꼭 마녀 같았다고 네가 엄청 웃었잖아.”
지우는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의 말에는 그날의 추억과 애틋함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는 은선의 기억 속에 희미하게라도 남아있을 실마리를 찾으려 애썼다. 그러나 은선의 눈빛에는 여전히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녀의 시선은 먼 허공 어딘가를 유영하는 듯했다.
지우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매일 반복되는 시도와 좌절. 그의 심장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다. 은선이 그에게 남겨준, 아니, 그들이 서로에게 남겨준 약속의 무게가 그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그는 주머니에서 작은 상자 하나를 꺼냈다. 서랍 깊숙이 넣어두었던 작은 오르골. 낡은 나무 상자 위에 새겨진 눈꽃 문양은 여전히 선명했다. 태엽을 감자, 익숙하면서도 아련한 멜로디가 병실을 가득 채웠다.
그 오르골은 오래전, 지우가 은선에게 선물했던 것이었다. 처음 눈꽃이 내리던 날, 두 사람은 온종일 눈밭에서 뒹굴며 놀다가 작은 상점에 들어가 몸을 녹였다. 그곳에서 지우는 이 오르골을 발견했고, 망설임 없이 은선에게 건넸었다. 은선은 그 선물을 받고 환하게 웃으며 꼭 끌어안았었다. 그 웃음은 오르골의 멜로디처럼 맑고 아름다웠다.
멜로디가 병실에 울려 퍼지자, 은선의 눈빛에 아주 미세한 떨림이 스쳤다. 마치 오래된 거울에 비친 흐릿한 상(像)처럼, 그녀의 심연 어딘가에서 무언가가 반응하는 듯했다. 그녀의 시선이 아주 느리게, 창밖에서 오르골 쪽으로 향했다. 얼어붙었던 호수에 잔잔한 파문이 일듯이, 그녀의 얼굴에 아주 희미한 변화가 감돌았다.
지우는 그 작은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그의 심장이 격렬하게 뛰기 시작했다. 희망의 불꽃이 그의 가슴속에서 작은 불씨처럼 다시 타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는 오르골을 은선의 손에 쥐여주었다. 차가운 그녀의 손가락이 낡은 나무 상자의 눈꽃 문양을 더듬었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의 눈에서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은선아…”
지우는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의 목소리는 감격과 애절함으로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기억나? 그해 겨울, 눈꽃이 우리 머리 위로 흩날리던 날. 우리가 약속했잖아. 어떤 일이 있어도… 이 눈꽃처럼 맑은 마음으로, 서로를 잊지 않겠다고. 길을 잃어도, 약속의 빛을 따라 다시 만나겠다고…”
그의 말이 끝나자, 은선의 메마른 입술이 아주 희미하게 움직였다. 작은 소리였지만, 지우는 그 소리를 놓치지 않았다. 모든 세상의 소음을 뚫고 그의 심장에 박히는 듯했다.
“…지우… 야…”
그의 이름이었다. 온전하지는 않았지만, 분명 그의 이름이었다. 지우는 솟구치는 눈물을 애써 삼켰다. 그의 심장에는 꺼져가던 작은 불씨가 다시금 타오르는 것을 느꼈다. 아직 갈 길은 멀었다. 은선의 기억은 여전히 안개 속에 갇혀 있었고, 그를 향한 그녀의 눈빛은 불안정했다. 하지만 그 작은 속삭임 하나로, 그는 다시 싸울 용기를 얻었다. 그날의 약속이 아직 살아있다는 증거였다. 창밖의 눈은 여전히 쉼 없이 내리고 있었다. 마치 그날의 약속처럼, 변치 않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