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은 이미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다. 희미한 달빛만이 가지를 잃은 앙상한 나무들의 실루엣을 그렸다. 겨울의 초입, 세상은 모든 색을 거두어들이고 침묵 속으로 잠겨드는 듯했다. 따뜻한 차 한 잔을 앞에 두고 나는 의자에 기대어 앉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왠지 모르게 마음 한구석이 텅 비어버린 듯한 쓸쓸함이 밀려왔다. 올 한 해는 유독 길게 느껴졌고, 그 안에서 나는 무얼 이루었는지, 어디로 나아가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마치 멈춰버린 시계처럼, 시간이 나만 비껴가는 것 같았다.
그때였다. 내 무릎 위로 가볍게 뛰어오르는 작은 온기. 보드라운 털과 부드러운 무게감. ‘하루’였다. 오랜 시간 내 곁을 지켜온 나의 작은 동반자. 하루는 조용히 무릎 위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 가르랑거리는 소리로 나의 불안한 마음을 토닥였다. 녀석의 크고 맑은 눈은 늘 그렇듯 나를 깊이 들여다보고 있었다.
“하루야,” 내가 나지막이 말했다. “나는 가끔 생각한다. 우리가 이토록 오랜 시간 함께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때가 있어. 그리고 그 시간 속에서 나는 변한 게 없는데, 세상은 너무나 빨리 변하는 것 같아서… 조금 두려워.”
하루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나의 눈을 응시했다. 그리고는 앞발로 내 팔을 톡톡 건드렸다. 마치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는 듯이. 녀석의 눈빛은 늘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네가 보지 못하는 것을 나는 보고 있다고, 네가 듣지 못하는 것을 나는 듣고 있다고.
“알아, 하루야. 너는 늘 나에게 괜찮다고 말해주는 것 같아. 하지만 때로는 그 괜찮다는 말이 너무 멀게 느껴져. 마치 내가 혼자서 이 모든 것을 감당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어.”
하루는 몸을 한 번 더 웅크리고는 길게 하품을 했다. 그리고는 앞발을 뻗어 내 손등을 스윽 긁었다. 날카롭지 않고 부드러운, 위로의 몸짓이었다. 녀석의 눈빛은 여전히 나를 향해 있었다.
“너는 매일 똑같은 하루를 살잖아, 하루야. 아침에 해가 뜨고, 낮잠을 자고, 밥을 먹고, 밤에는 나랑 이렇게 있거나 창밖을 보거나… 근데 너는 왜 매일 새롭지? 매일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 같아.”
하루는 작게 ‘냐앙’ 하고 울었다. 그 소리는 마치 바스락거리는 마른 잎사귀 소리 같기도 했고, 멀리서 들려오는 종소리 같기도 했다. 나는 하루의 말을 늘 마음으로 들었다. 녀석이 나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단어보다는 감정으로, 움직임보다는 눈빛으로 다가왔다.
‘새롭지 않다고 누가 그랬나요?’ 하루의 목소리가 내 안에서 울리는 듯했다. ‘해는 매일 뜨지만, 어제의 해와 오늘의 해는 같은가요? 같은 길을 걷지만, 발밑의 돌멩이 하나, 스쳐가는 바람의 방향 하나까지 어제와 같을 수는 없어요. 당신이 매일 똑같다고 느끼는 것은, 당신의 시선이 변하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르죠.’
나는 녀석의 말을 곱씹었다. 나의 시선.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 어쩌면 나는 너무 익숙한 것들 속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하려 하지 않았던 걸까. 늘 같은 장소에서, 같은 시간에, 같은 방식으로.
“그래… 내가 변해야 하는 걸까.”
하루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정확히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변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에요. 당신은 당신의 방식으로 충분히 빛나고 있어요. 다만, 그 빛을 당신 스스로가 가리고 있을 뿐이죠.’
나는 하루의 털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녀석의 온기가 내 손을 타고 마음으로 전해졌다.
‘두려움은 그림자와 같아요. 빛이 강할수록 그림자도 짙어지죠. 하지만 그림자는 빛이 있어야만 존재할 수 있어요. 당신의 두려움이 크다는 것은, 당신 안에 그만큼 큰 빛이 있다는 증거이기도 해요.’
하루의 말에 나는 눈을 감았다. 가슴속 깊이 응어리졌던 차가운 감정들이 서서히 녹아내리는 것을 느꼈다. 869번째 겨울을 맞이하며 나는 하루와 함께 수많은 계절을 보냈다. 수많은 대화를 나누며, 수많은 위로와 깨달음을 얻었다. 녀석은 길고양이로 내게 왔지만, 이제는 나의 가장 깊은 내면을 이해하는 현자가 되어 있었다.
“빛… 나의 빛…” 나는 중얼거렸다.
하루는 무릎에서 내려와 창가로 총총 걸어갔다. 그리고는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희미한 달을 올려다봤다. 녀석의 실루엣은 달빛에 은은하게 빛났다.
‘저 달은 매일 밤 떠오르지만, 매일 다른 모습으로 빛나죠. 어떨 때는 작고 초라해 보이지만, 그래도 스스로의 빛을 잃지 않아요. 당신도 마찬가지예요. 당신의 빛은 언제나 그곳에 있어요. 잠시 구름에 가려져 보이지 않을 뿐이죠.’
나는 하루의 옆으로 다가가 녀석의 등을 쓰다듬었다. 차가웠던 마음이 따뜻한 온기로 가득 채워지는 것 같았다. 869화의 밤, 하루는 또다시 나에게 삶의 깊은 의미를 가르쳐주었다. 새로운 한 걸음을 내딛는 용기보다는, 이미 가지고 있는 빛을 다시 발견하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을.
나는 하루를 안아들었다. 녀석은 익숙하게 내 품에 안겨 가르랑거렸다. 창밖의 겨울밤은 여전히 고요했지만, 내 안의 겨울은 하루의 온기로 인해 조금씩 물러나고 있었다. 길고양이와의 대화는 오늘도 나의 세상을 환하게 비추는 작은 등불이 되어주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