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이 내리던 날이었다. 창밖은 온통 하얀색으로 물들었고, 세상의 모든 소음은 부드러운 눈송이 아래 잠들어 버린 듯했다. 도시의 번잡함마저 숨을 죽인 고요함 속에서, 서윤은 따뜻한 차가 식어가는 것도 모른 채 창가에 멍하니 서 있었다. 874화의 시간이 흘렀지만, 그녀에게는 여전히 그 겨울날의 약속이 어제처럼 생생했다.
새하얀 침묵 속에서
손가락 끝이 시릴 정도로 차가웠던 그날의 공기, 하얗게 흩날리던 눈송이들 사이로 비치던 그의 눈빛. 그리고 그 눈빛 안에 담겨 있던 맹세. 그는 젖은 손으로 그녀의 볼을 감싸 안으며 말했다. ‘어떤 시련이 와도, 어떤 시간이 흘러도, 우리는 이 약속을 지켜낼 거야. 반드시.’
서윤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 미소는 곧 쓰디쓴 체념으로 변했다. 시간은 가장 잔인한 조각가였다. 선명했던 약속의 형체는 어느새 모호해지고, 믿음의 기반은 자꾸만 흔들렸다. 찰나의 순간, 마음속 깊이 묻어두었던 조각들이 눈꽃처럼 피어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녀의 발치에 놓인 오래된 상자 안에는 빛바랜 사진 한 장이 들어 있었다. 앳된 얼굴의 두 연인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서윤과 하준. 그들은 순수했고, 미래는 무한했으며, 약속은 영원할 줄 알았다. 하지만 영원은 짧았고, 순수는 세상의 모진 풍파에 깎여나갔다.
그때, 침묵을 깨고 서윤의 낡은 휴대폰이 진동했다. 발신자는 ‘하준’. 그의 이름이 화면에 뜨는 순간,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수많은 밤을 지새우게 했던 이름. 그리움과 원망이 공존하는 단 하나의 이름.
서윤은 숨을 들이켰다. 전화를 받을지 말지 망설였다. 874화가 이어지는 동안, 그들의 관계는 늘 이 아슬아슬한 줄타기 같았다. 끊어질 듯 이어지고, 이어질 듯 끊어지기를 반복하는. 결국 그녀는 손가락을 움직여 전화를 받았다.
낮게 깔린 하준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흘러왔다. “서윤아… 지금… 그곳으로 가고 있어. 널 기다리고 있을게.”
서윤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곳’이라면, 그들의 약속이 시작되었던 그 낡은 오두막을 의미했다. 도시의 외곽, 인적이 드문 산자락에 고립된 듯 서 있는 작은 나무 오두막. 겨울 눈꽃이 가장 아름답게 쌓이던 곳.
가야 할까. 아니, 가지 말아야 할까. 그녀는 수없이 이 질문 앞에 섰었다. 매번 다른 답을 찾았고, 매번 같은 후회로 끝이 났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874화에 이르러 그녀의 마음속에는 설명할 수 없는 확신, 혹은 포기가 고개를 들었다. 이제는, 끝을 내야 할 시간이었다. 이 길고 지독한 이야기를.
낡은 약속의 흔적
차디찬 겨울바람이 서윤의 뺨을 스쳤다. 눈밭 위에 찍히는 발자국마다 지난 세월의 무게가 실리는 듯했다. 그녀의 차는 묵묵히 눈 덮인 길을 달렸다. 스노타이어가 눈을 헤치는 소리만이 정적을 깨뜨렸다.
그 약속은 순수했다.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순백의 약속.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그 약속은 너무 많은 오해와 상처를 품게 되었다. 엇갈린 진심, 숨겨야 했던 비밀, 그리고 지켜내지 못한 약속에 대한 죄책감들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 오두막에 갔던 것이 언제였던가. 기억조차 가물가물했다. 아마, 그들의 관계가 가장 깊은 파국으로 치달았을 때였을 것이다. 서로를 향해 날카로운 칼날을 휘두르던 밤. 그 밤도 눈이 내렸었다. 매섭게 몰아치던 눈보라 속에서, 그들은 가장 비참한 말들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약속은, 산산조각 났다고 그녀는 믿었다.
하지만 하준은 끝내 그 약속을 놓지 않았고, 서윤 또한 완전히 놓아버리지 못했다. 그것이 그들이 874화까지 이어진 이유였다. 질긴 인연, 혹은 지독한 미련.
굽이진 산길을 한참 올라가자, 눈밭 위에 고독하게 서 있는 낡은 오두막이 보였다. 오랜 세월을 버텨온 나무 벽은 퇴색했고, 지붕에는 두터운 눈이 쌓여 있었다. 창문에는 차가운 서리가 내려앉아 안을 엿볼 수 없었다. 마치 그들의 지나온 시간처럼, 불투명하고 알 수 없는. 서윤은 차를 세우고 천천히 오두막으로 향했다. 발자국마다 시린 눈물이 얼어붙는 듯했다.
문이 열리고, 차가운 공기 속에서 하준이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지만, 눈빛만은 그 겨울날과 다름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깊은 호수처럼, 그러나 그 안에는 격렬한 폭풍이 휘몰아치는 듯한 눈빛. 서윤은 아무 말 없이 그를 마주 보았다. 오랜 침묵이 오두막 안을 가득 채웠다.
“왔구나.” 하준이 겨우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쉬어 있었다. “올 줄 알았어.”
“무슨 말을 할 생각이야, 하준아?” 서윤은 한숨을 쉬었다. “이 약속이… 아직도 유효하다고 생각해? 우리에게 남은 게… 정말 있다고 생각해?”
하준은 천천히 서윤에게 다가왔다. 그의 손이 서윤의 뺨으로 향했다. 그때와 똑같은, 차가우면서도 뜨거운 손길이었다. 서윤은 그의 손길을 피하지 않았다. 그 따뜻하고도 시린 온기를, 그녀는 너무나 오랫동안 그리워했기 때문이었다.
다시, 그 겨울의 끝자락에서
하준의 눈동자가 깊게 흔들렸다. “유효한 게 아니야, 서윤. 이건… 우리 삶의 전부였어.”
그는 주머니에서 낡은, 하지만 정성스레 보관된 작은 나무 조각을 꺼냈다. 투박하게 깎인 조각 위에, 흐릿하게 ‘서윤♡하준’이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그 겨울날, 하준이 그녀를 위해 밤새 깎아 만들었던, 그들의 사랑과 약속의 증표였다.
서윤의 눈가가 시큰거렸다. 지켜내지 못한 약속에 대한 죄책감, 그리고 여전히 놓지 못하는 미련이 그의 눈빛 속에서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하준은 나무 조각을 서윤의 손에 쥐여주었다. 차가웠던 나무 조각은 그녀의 손안에서 서서히 온기를 되찾는 듯했다.
“이걸… 아직 가지고 있었어?” 서윤의 목소리가 떨렸다.
“어떻게 버려. 이걸 버리면… 내 삶의 가장 찬란했던 순간들을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인데.” 하준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는 서윤의 손을 잡고 조용히 오두막 안으로 이끌었다.
오두막 안은 낡고 먼지가 쌓여 있었지만, 어딘가 모르게 따뜻한 온기가 남아 있는 듯했다. 벽에는 그들이 함께 찍었던 낡은 사진들이 붙어 있었고, 한쪽 구석에는 하준이 서윤을 위해 직접 만들었던 작은 나무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모든 것이 멈춰버린 듯, 시간의 흐름을 거부하는 공간이었다.
서윤은 그 조각을 보았다. 그리고 그 안에 새겨진 자신들의 이름, 그 이름들 사이에 깊게 파인 시간의 흔적을. 그녀는 알았다. 이 지독한 약속은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874화의 눈꽃은 그들의 이야기 위에 새롭게 쌓이고 있었다. 오래된 상처 위에, 새로운 희망의 씨앗을 심을지, 아니면 이 지독한 미련을 마침내 끊어낼지. 그리고 이제, 이 눈꽃 속에서 또 다른 결정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하준의 흔들리는 눈빛 속에서, 서윤은 답을 찾아야만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