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첫사랑을 찾는 탐정 – 제873화

오후의 햇살이 낡은 창문을 비집고 들어와 먼지 가득한 공기 속에서 은색으로 부서졌다. 지훈은 손때 묻은 테이블에 놓인 식어버린 커피잔을 말없이 응시했다. ‘골목 안 작은 다방’이라는 간판이 무색하게, 시간의 흐름을 고스란히 간직한 이곳은 이제 그저 낡은 카페였다. 그의 손에는 낡은 종이 사진 한 장이 들려 있었다. 세월의 흔적으로 바랜 사진 속에는 풋풋한 미소를 짓는 수아와, 그녀의 옆에서 익살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또 다른 여인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정은혜. 수아의 대학 시절 가장 친한 친구였다고 했다. 그리고 이 카페는, 은혜가 한때 아르바이트를 했던 곳으로 추정되는 유일한 단서였다.

수백 번, 아니 수천 번도 더 많은 허탕을 치고 지쳐가는 여정이었다. 잃어버린 첫사랑을 찾아 헤맨 지 햇수로 스무 해가 넘었다. 처음엔 뜨거운 열정으로, 다음엔 끈질긴 집념으로, 이제는 그저 삶의 일부가 되어버린 이 고독한 추적.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그의 눈앞에 아른거리는 것은, 벚꽃이 흩날리던 캠퍼스에서 햇살처럼 웃던 수아의 얼굴이었다. 그 얼굴이, 그의 심장을 다시 뛰게 했다. 제873화. 숫자가 늘어날수록, 수아와의 거리는 멀어지는 듯했지만, 동시에 희미한 실마리들이 하나씩 이어지는 기적이 일어나곤 했다.

“뭘 그렇게 골똘히 보세요, 총각?”

어느새 테이블 옆에 다가온 백발의 할머니가 따뜻한 미소로 지훈을 바라보았다. 이 카페의 주인인 듯했다. 지훈은 사진을 접어 주머니에 넣으며 고개를 들었다. “혹시… 정은혜라는 분을 아시는지요? 예전에 여기서 일하셨다고 해서요.”

할머니는 허리가 굽은 채 낡은 테이블을 닦으며 희미하게 눈을 가늘게 떴다. “정은혜라… 아, 은혜 말인가? 아주 오래전 일인데. 키 크고, 그림 그리던 아이? 명랑하고 싹싹해서 참 예뻤지. 대학생이었을 거야.” 할머니의 기억 저편에서 어렴풋이 한 인물이 떠오른 모양이었다. 지훈의 심장이 조용히, 그러나 강렬하게 뛰기 시작했다.

“네, 맞아요. 혹시 지금은 어디에 계시는지 아시나요?”

“글쎄… 여기서 일하다가 졸업하고는 한동안 연락이 뜸했지. 그러다가… 어렴풋이 들은 이야기로는, 저기 뒷골목에 새로 생긴 미술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친다고 했었나? ‘꿈을 그리는 아이들’인가, 그런 이름이었는데. 오래전 이야기라 확실치는 않아. 지금은 또 바뀌었을지도 모르지.”

지훈은 벌떡 일어섰다. 몸 안 가득 새로운 피가 도는 기분이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할머니는 그런 지훈을 보며 빙긋 웃었다. “총각, 첫사랑이라도 찾나? 눈이 아주 반짝거리는구먼.” 그 말에 지훈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첫사랑. 단순한 첫사랑 이상의 것이었다. 그것은 그의 존재 이유가 되어버린, 삶의 모든 갈피마다 새겨진 이름이었다.

카페를 나선 지훈은 할머니가 알려준 뒷골목으로 향했다. 낡은 상가들 사이로 좁은 길이 이어졌다. ‘꿈을 그리는 아이들’이라는 간판은 없었지만, 대신 오래된 목조 건물 2층에 ‘소담 미술 공방’이라는 간판이 보였다. 유리창 너머로 아이들의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지훈은 망설임 없이 계단을 올랐다.

문이 열리고, 석고상과 그림 도구들이 가득한 익숙하면서도 낯선 공간이 나타났다. 작업복을 입은 한 여인이 아이들과 함께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아이들은 여인의 설명을 들으며 작은 손으로 캔버스에 색을 입히고 있었다. 지훈의 눈은 곧장 그 여인에게 향했다. 낡은 사진 속의 모습보다 주름이 깊어졌지만, 눈매와 웃음은 그대로였다. 정은혜였다.

아이들이 잠시 쉬는 시간을 틈타 지훈은 은혜에게 다가갔다. “실례합니다. 혹시 정은혜 선생님이신가요?”

은혜는 고개를 들었다. 약간 경계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네, 그런데 누구시죠?”

지훈은 주머니에서 낡은 사진을 꺼내 내밀었다. “이 사진 속의… 수아를 찾고 있습니다. 저는 박지훈이라고 합니다. 수아의… 첫사랑입니다.”

은혜의 눈이 사진 위에서 흔들렸다. 그리고 이내 지훈에게로 돌아왔다. 그녀의 표정에는 놀라움과 함께 깊은 슬픔이 스쳐 지나갔다. “지훈 씨…?” 그녀는 그 이름을 발음하는 것만으로도 무언가 고통스러운 기억을 떠올린 듯했다. “설마… 아직도 수아를 찾고 계셨군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믿을 수 없다는 듯한 감정이 섞여 있었다. 지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은혜 씨를 찾는 데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혹시… 수아가 어디 있는지 아시나요?”

은혜는 의자에 풀썩 앉았다. 그녀의 시선은 먼 허공을 응시했다. “수아… 그래, 수아는 제게도 정말 소중한 친구였어요. 하지만 수아는… 아주 오래전에 한국을 떠났습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갑자기요.”

지훈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떠났다구요? 어디로… 무슨 일 때문에요?”

은혜는 한숨을 쉬었다. “당시 수아에게는 말 못 할 아픔이 있었어요. 개인적인 일이라 자세히 말씀드리기는 어렵지만… 아마 그 아픔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모든 것을 잊고 새롭게 시작하고 싶었을 거예요. 저에게도 연락을 끊었으니… 지훈 씨에게는 더더욱 말할 이유가 없었겠죠. 미안해요. 그땐 지훈 씨가 그렇게 수아를 찾아 헤맬 줄은 상상도 못 했어요.”

지훈은 눈을 감았다. 수아에게 아픔이 있었다는 사실을 그는 전혀 알지 못했다. 그의 행복했던 첫사랑의 기억 뒤편에, 수아가 홀로 감당해야 했던 고통이 숨어 있었다는 것을. 가슴이 저릿했다. 오랜 시간 그녀를 찾아 헤맸지만, 그녀의 깊은 그림자까지는 미처 헤아리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어디로 떠났는지… 정말 아무것도 모르시나요?” 지훈은 마지막 희망을 걸고 물었다.

은혜는 고개를 저으며 눈물을 글썽였다. “정확히는 몰라요. 하지만… 수아가 항상 말하던 곳이 있었어요. ‘천 년의 푸른 빛을 간직한 도자기’, ‘하늘과 바다 사이에서 영혼을 빚는 사람들’이라고 표현하곤 했죠. 어떤 특별한 푸른 유약 기법을 배우고 싶어 했어요. 동양의 아주 먼 지역에서 전해 내려오는 거라고… 한 번은 수아가 직접 빚은 작은 토기 조각을 보여주며, 언젠가 그곳에 가서 진정한 푸른색을 만들고 싶다고 했어요.”

은혜는 자리에서 일어나 한쪽 진열장으로 다가갔다. 그곳에는 그녀의 작품들과 아이들의 그림들 사이에, 색이 바래고 투박하지만 정교한 작은 토기 조각이 놓여 있었다. 한쪽 면에는 푸른빛을 시도하다 만 듯한 희미한 얼룩이 남아 있었다. “이거요. 수아가 졸업 전시회 때 만들었던 작은 작품 중 하나예요. 다른 것들은 모두 팔리거나 버려졌지만, 이것만은 제가 가지고 있었어요. 수아의 꿈이 담겨 있던 조각 같아서요.”

지훈은 떨리는 손으로 그 토기 조각을 받아들었다. 거칠고 투박한 흙의 감촉.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수아의 꿈과 열정, 그리고 미지의 푸른빛. ‘천 년의 푸른 빛을 간직한 도자기’, ‘하늘과 바다 사이에서 영혼을 빚는 사람들’. 이 추상적인 단서들이 지훈의 머릿속에서 거대한 퍼즐 조각이 되어 맞물리기 시작했다. 아픔을 겪고 모든 것을 내려놓았던 수아가, 어쩌면 그 꿈을 좇아 떠났을 수도 있다는 희망이 그의 가슴을 뜨겁게 달구었다.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은혜 씨.” 지훈의 목소리가 먹먹하게 울렸다.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를 괴롭혔던 깊은 안개가, 한 줄기 빛에 의해 조금이나마 걷히는 기분이었다. 이제 막연한 그리움이 아닌, 구체적인 목표가 생겼다.

은혜는 지훈을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수아는 정말 특별한 아이였어요. 지훈 씨가 이렇게 오랫동안 찾아 헤맬 만큼이요. 부디… 부디 다시 만나시길 바라요.”

공방을 나서는 지훈의 발걸음은 아까와는 확연히 달랐다. 여전히 무거운 마음 한구석에는 수아의 아픔에 대한 안타까움이 있었지만, 동시에 새로운 희망과 굳건한 결의가 그의 어깨를 펴게 했다. 낡은 토기 조각을 손에 쥔 채, 그는 다시 길을 걸었다. 잃어버린 첫사랑을 찾아 헤매는 탐정의 여정은, 이제 푸른빛을 좇아 미지의 동양으로 향하는 새로운 장을 맞이하게 될 터였다. 873번째 페이지에서, 그의 이야기는 다시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