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잃어버린 시간 여행자 – 제877화

시간의 회랑은 언제나 그랬듯, 잔혹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무수한 빛의 조각들이 끝없이 춤추는 공간. 그것은 과거와 현재, 미래의 모든 파편들이 한데 뒤섞여 만들어내는 혼돈의 오케스트라였다. 리나는 그 중심에서 심장이 찢어질 듯한 아픔을 느꼈다. 어쩌면 심장이 아니라, 기억의 잃어버린 조각들이 일으키는 고통일지도 몰랐다.

그녀의 곁을 지키는 카이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주변을 경계했다. 그의 얼굴에는 피로와 근심이 역력했지만, 리나를 향한 시선만큼은 변함없이 굳건했다. “리나, 괜찮아? 너무 깊이 들어가면 안 돼. 이곳은 시간의 균열이 너무 심해서 정신까지…”

카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리나는 흐릿한 빛의 장막 너머로 손을 뻗었다. 손끝에 닿는 차갑고도 아련한 감촉. 그것은 마치 존재했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모순된 감각이었다. 그 순간, 그녀의 뇌리를 스치는 것은 차가운 겨울바람과 함께 들려오는 맑은 웃음소리였다. ‘엄마! 저기 저것 좀 보세요!’ 어린아이의 목소리. 누구의 목소리일까? 어째서 이토록 생생하게 들려오는 것일까?

리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두통이 머리를 깨부수는 듯했다. “난… 난 괜찮아, 카이. 이곳에 내가 찾아야 할 것이 있어. 아주 중요한 것.”

그녀의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회랑의 가장 깊숙한 곳, 시간의 흐름이 뒤틀려 하나의 거대한 소용돌이를 이루는 지점이었다. 그곳에는 거대한 푸른빛 결정체가 허공에 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수만 개의 별을 응축해 놓은 듯 찬란하게 빛났고, 동시에 알 수 없는 불안감을 안겨주었다. 카이가 작게 중얼거렸다. “기억의 핵… 이곳에 보관되어 있었을 줄이야.”

리나는 결정체에 손을 가져다 댔다. 순간, 강력한 전류가 그녀의 몸을 꿰뚫는 듯한 충격이 전해졌다. 파편처럼 부서져 있던 기억들이 한꺼번에 밀려들어오는 고통에 그녀는 비명을 지를 뻔했다. 하지만 동시에, 잊고 있던 장면들이 섬광처럼 스쳐 지나갔다. 따뜻한 햇살 아래, 자신을 향해 웃고 있는 한 남자. 그의 손을 잡고 있는 어린아이. 행복했던 순간들이었다. 그러나 그 행복은 한순간이었다. 곧이어 모든 것이 불타오르고, 비명과 절규가 난무하는 지옥도가 펼쳐졌다. 그녀는 그 한가운데 서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안 돼… 이건… 내가 원했던 게 아니야!” 리나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기억의 핵으로부터 손을 떼어냈다. 바닥에 주저앉아 거친 숨을 몰아쉬는 그녀의 눈가에는 뜨거운 눈물이 맺혔다. “모든 것이 파괴됐어. 내가… 내가 그들을 지키지 못했어!”

카이가 다가와 그녀를 부축하려 했다. “리나,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 기억의 핵이 네게 뭘 보여준 거지?”

리나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내가 지키려 했던 모든 것이 사라졌어. 내 가족… 내 세상… 그 모든 것을 지키기 위해 내가 여기까지 온 건데… 이미 너무 늦었어.” 그녀의 목소리에는 깊은 절망이 배어 있었다. 자신의 과거가 이토록 처참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모든 기억을 잃고 헤맬 때조차, 마음 한구석에는 언제나 따스한 희망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눈앞에 펼쳐진 진실은 그 희망마저 산산조각 내 버렸다.

바로 그때였다. 회랑을 가득 메운 빛의 조각들이 거칠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시간의 흐름이 급변하는 것을 감지한 카이가 급히 리나를 보호하듯 팔을 뻗었다. “이런! 시간 관리국 놈들인가? 이 정도의 시간 교란은 보통 짓이 아니야!”

번쩍이는 섬광과 함께, 무장한 시간 관리국 요원들이 회랑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들의 선두에는 차갑고도 냉혹한 표정을 한 국장 벨레로폰이 서 있었다. 그의 눈은 마치 시간 자체를 꿰뚫어 보는 듯한 섬뜩한 빛을 띠고 있었다.

“결국 여기까지 왔군, 리나.” 벨레로폰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네가 이 기억의 핵을 건드리지 않기를 바랐건만. 너의 과거는 너에게 너무나도 잔혹한 진실을 담고 있다. 그리고 그 진실은 현재의 시간선에 파멸을 가져올 것이다.”

리나는 온몸의 힘을 쥐어짜 일어섰다. 기억의 핵에서 본 처참한 진실과, 벨레로폰의 경고가 머릿속에서 뒤섞이며 그녀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파멸이라니… 무슨 뜻이야? 내가… 내가 뭘 했길래?”

벨레로폰은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 “넌 ‘시작’이었다. 모든 것을 뒤바꿀 수 있었던 유일한 열쇠이자, 동시에 모든 것을 파괴할 수 있었던 가장 위험한 존재. 그래서 우리는 너의 기억을 봉인하고, 너를 시간의 흐름에서 격리시켰던 것이다. 네가 이 핵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말이지.”

그의 말과 함께, 요원들이 공격 태세를 갖추었다. 리나는 온몸의 세포가 저항하는 것을 느꼈다. 자신은 파괴자가 아니었다. 자신은 무언가를 지키려 했던 사람이다. 하지만 기억의 핵이 보여준 불타는 세계는 그녀의 확신을 흔들었다.

카이가 앞으로 나서며 팔에 장착된 에너지 방어막을 펼쳤다. “리나,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이들이 널 잡아가게 둘 순 없어!”

수십 발의 에너지탄이 방어막에 부딪히며 섬광을 일으켰다. 회랑 전체가 전투의 열기로 가득 찼다. 그 혼란 속에서, 리나는 다시 한번 기억의 핵을 응시했다. 무언가… 무언가 빠진 것이 있었다. 불타는 세상, 절규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 서 있던 자신의 모습. 하지만 그때, 핵의 가장 깊숙한 곳에서, 희미한 빛이 그녀를 유혹하듯 깜빡였다. 그것은 고통스러운 기억들 너머에 감춰진, 또 다른 진실의 속삭임 같았다.

리나는 벨레로폰의 말을 무시하고 기억의 핵으로 다시 손을 뻗었다. “안 돼, 리나! 위험해!” 카이가 소리쳤지만, 그녀는 이미 핵과 접촉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고통이 아니었다. 슬픔도, 절망도 아니었다. 핵의 심연 속에서, 그녀 자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주 오래전, 아직 기억을 잃기 전의 자신의 목소리였다.

‘리나… 나 자신에게 보내는 마지막 경고야. 네가 이 핵을 보게 될 때쯤이면, 모든 것이 뒤틀려 있을 거야. 시간 관리국은 너의 기억을 지웠을 테고, 너는 내가 남긴 파괴의 흔적만을 보게 되겠지. 하지만 잊지 마. 그 파괴는… 나 자신의 실패가 아니었어. 그것은 내가 미래를 막기 위해 스스로 선택한 길이었다. 이 핵은 단순히 네 기억만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야. 내가 실패했던 수많은 시간선들의 기록을 담고 있어. 그리고 그 속에는… 네가 절대로 반복해서는 안 될 단 하나의 진실이 숨겨져 있다.’

리나의 심장이 멎는 듯했다. 핵이 보여준 불타는 세상은 그녀의 실패가 아니었다. 그것은 미래의 파멸을 막기 위한, 과거의 자신이 선택했던 처절한 희생의 기록이었다는 말인가? 그녀의 과거가 이렇게 복잡하고 잔혹한 역사를 가지고 있을 줄이야. 하지만 그 진실은 무엇일까? ‘절대로 반복해서는 안 될 단 하나의 진실’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벨레로폰이 이를 악물었다. “멈춰라! 그 기억의 핵에는 너의 현재를 무너뜨릴 힘이 담겨 있어!”

리나의 눈은 핵 속에서 번쩍이는 작은 빛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 빛 속에서, 그녀는 희미한 형체를 보았다. 자신의 과거의 모습. 그리고 그 과거의 자신이, 핵 깊은 곳에 마지막 메시지를 새기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히 정보가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의 ‘선택’에 대한 경고이자, ‘절망’에 빠지지 말라는 간절한 호소였다.

‘기억해, 리나. 진정한 파멸은… 포기에서 시작돼.’

그 메시지와 함께, 기억의 핵 전체가 갑작스럽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회랑의 빛들이 격렬하게 요동치며 주변 공간 자체가 붕괴될 것 같은 불안감을 안겨주었다. 벨레로폰과 요원들은 당황하여 뒤로 물러섰다. “이런! 핵이 폭주하고 있어! 어서 철수해!”

리나는 자신을 향해 팔을 뻗는 카이의 손을 뿌리쳤다. 그녀의 눈은 이제 더 이상 절망에 물들어 있지 않았다. 슬픔은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그보다 더 강렬한 결의가 타올랐다. 그녀는 기억의 핵이 품고 있는 모든 진실을 알아야만 했다. 설령 그것이 자신을 파괴할지라도.

거대한 빛의 파동이 회랑을 강타했고, 리나는 빛 속으로 완전히 빨려 들어갔다. 카이가 그녀의 이름을 절규하듯 외쳤지만, 이미 늦었다. 기억의 핵은 빛을 토해내며 서서히 사라져갔고, 그와 함께 리나의 모습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회랑은 다시 고요해졌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하지만 카이의 마음속에는, 그리고 벨레로폰의 냉혹한 눈빛 속에는, 폭풍 같은 진실이 몰아닥치고 있었다. 리나는 사라졌다. 하지만 그녀가 찾아낸 ‘단 하나의 진실’은 이제 새로운 시간선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할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