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공기가 고대 석조 건물 사이를 맴돌았다. 별의 심장, 리안이 수많은 밤을 지새우며 잃어버린 기억의 조각들을 찾아 헤맨 은신처였다. 천장에는 별자리가 새겨진 돔이 펼쳐져 있었고, 그 아래 중앙에는 시간의 흐름을 왜곡하여 보여주는 홀로그램 지도가 끊임없이 일렁였다. 수십만 개의 빛줄기가 겹치고 흩어지며 무수한 가능성의 시간대를 형상화하고 있었다.
리안은 지도 위에 손을 뻗었다. 손끝에서 은은한 푸른빛이 퍼져나가며 특정 시간 축을 따라 흘렀다. 그러나 여전히 그들이 찾던 ‘핵심 기억’은 아지랑이처럼 잡히지 않았다. 고통스러운 두통이 미간을 짓눌렀지만, 리안은 포기할 수 없었다. 기억을 잃은 채 살아온 시간은 리안을 무한한 공허 속에 가두었다. 누구인지, 왜 이곳에 있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든 것이 안갯속이었다.
“오늘도 마찬가지군요.”
뒤에서 들려오는 부드러운 목소리에 리안은 어깨를 살짝 떨었다. 한수아였다. 수아는 별의 심장의 유일한 관리자이자, 기억을 잃은 리안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동반자였다. 그녀의 얼굴에는 걱정과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모든 시간대가 저를 거부하는 것 같습니다. 마치 제가 이 모든 것의 오류인 양.” 리안의 목소리에는 깊은 피로가 배어 있었다.
수아는 리안의 옆으로 다가와 차가운 손을 잡았다. “당신은 오류가 아니에요. 단지, 당신의 존재가 너무나 중요해서, 시간 스스로가 당신을 보호하고 있는지도 모르죠.”
리안은 씁쓸하게 웃었다. “보호인가요, 아니면 고립인가요? 884개의 장이 지나도록, 저는 단 하나의 진실된 기억조차 붙잡지 못했습니다. 제 이름 외에는 아무것도요.”
그때, 홀로그램 지도의 한 지점에서 미세한 파동이 일었다. 다른 빛줄기들과는 확연히 다른, 그러나 너무나 희미해서 금방이라도 사라질 듯한 떨림이었다. 리안의 눈이 순간적으로 빛났다. 그 떨림은 낯설지 않았다. 마치 수없이 꿈에서 보았던, 그러나 잡히지 않던 환영 같았다.
“이건…?” 리안은 지점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푸른빛이 떨리는 지점과 닿자, 머릿속에서 강렬한 섬광이 터져 나왔다. 번개처럼 빠르고, 심장을 뒤흔드는 감각이었다.
파직!
눈앞이 흐려지고, 귀청을 때리는 듯한 노이즈 속에서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리안… 잊지 마… 엘라…”
그리고 따뜻한 손길, 눈물이 맺힌 눈동자, 안타까움이 가득한 표정. 순간적으로 리안의 온몸을 휘감은 것은 걷잡을 수 없는 슬픔과 그리움이었다.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감정은 고통스러울 정도로 생생했다. 마치 오래된 상처가 다시 터져버린 것처럼.
“리안! 괜찮아요?” 수아의 다급한 목소리가 리안을 현실로 끌어냈다. 리안은 비틀거리며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손가락을 댄 지점의 파동은 더욱 강렬해져 있었지만, 여전히 위태로웠다. 사라지기 일보 직전의 촛불처럼.
“엘라…” 리안은 무의식중에 그 이름을 중얼거렸다. 처음으로, 온전한 단어 하나가 기억의 파편 속에서 튀어나왔다. 그것은 이름이었고, 동시에 리안의 심장을 찢어놓는 칼날과 같았다.
수아는 홀로그램 지도를 유심히 살폈다. “이건… 당신의 고유 시간 지문이에요. 이토록 선명하게 나타난 건 처음이에요. 하지만 위치가… 너무나 불안정해요. 그리고 이 시간 축은 ‘절대 금지’ 구역에 인접해 있어요. 시간 관리국이 끊임없이 감시하는 곳이에요.”
시간 관리국. 리안의 존재를 ‘시간의 변수’로 규정하고 집요하게 추적하는 그림자 조직. 그들의 감시망에 걸리면 리안의 시간 여행은 영원히 끝날 것이었다. 그러나 ‘엘라’라는 이름이 불러온 감정의 격랑은 모든 두려움을 삼켜버렸다.
“가야 합니다.” 리안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어떤 위험이 있더라도, 저곳으로 가야 해요. 저곳에 제 모든 것이 있을 겁니다.”
수아의 얼굴에 복잡한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위험해요. 지난번 ‘잃어버린 시계탑’ 사건 이후, 관리국의 감시가 훨씬 강화됐어요. 이 시간 지점은 함정일 수도 있습니다.”
“함정이라도 상관없어요. 엘라… 이 이름이 저를 부르고 있어요. 제 심장이 말하고 있어요.” 리안은 주먹을 꽉 쥐었다. 884개의 챕터 동안, 리안을 이끌었던 것은 막연한 희망이었다. 하지만 이제, 리안에게는 목표가 생겼다. 명확한 이름과 강렬한 감정이 존재의 이유를 외치고 있었다.
수아는 한숨을 쉬었다. “당신을 말릴 수는 없겠죠. 좋아요. 하지만 이번엔 제가 동행할 수 없습니다. 관리국의 추적망이 너무 촘촘해요. 별의 심장 자체가 노출될 위험이 있습니다. 당신은 혼자 가야 해요.”
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각오한 일이었다. 언제나 혼자였다. ‘시간의 닻’을 준비하는 수아를 바라보며, 리안은 자신의 품속에 깊이 숨겨둔 낡은 팬던트를 만졌다. 기억은 없지만, 늘 지니고 다녔던 유일한 유품이었다. 차가운 금속에서 엘라의 따뜻한 손길이 느껴지는 듯했다.
‘절대 금지’ 구역으로 통하는 시간의 문이 열렸다. 푸른빛이 소용돌이치며 미지의 공간으로 이끄는 통로가 만들어졌다. 리안은 심호흡을 했다. 이번 여정은 그 어떤 모험보다 위험하고, 그 어떤 과거보다 아픈 진실을 마주하게 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망설임은 없었다.
“부디… 무사히 돌아오세요, 리안.” 수아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리안은 수아를 향해 마지막으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미지의 심연 속으로 한 발짝 내디뎠다. 홀로그램 지도의 떨리던 빛은 리안이 사라지는 순간, 더욱 격렬하게 요동치다가 이내 고요해졌다. 리안은 이제 ‘엘라’가 기다리는 곳, 혹은 ‘엘라’가 존재했던 시간의 흔적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잃어버린 기억의 마지막 조각이 그곳에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