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이 빛나는 밤의 라디오 – 제887화

새벽녘 별무리에게

밤은 깊고 고요했다. 창밖은 검푸른 벨벳처럼 내려앉았고, 가끔씩 휘파람처럼 스쳐가는 바람만이 도시의 존재를 일깨웠다. 지원은 식탁에 엎드린 채, 한참이나 꺼진 휴대폰 화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손끝에서 스며드는 차가운 감촉이 오히려 정신을 또렷하게 했다. 오늘따라 유독 마음이 허했다. 하루 종일 애써 외면했던 공허함이 밤의 장막 아래서 더욱 또렷하게 고개를 들었다.

습관처럼 손을 뻗어 낡은 라디오의 다이얼을 돌렸다. 지직거리는 소음 너머로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별이 빛나는 밤의 라디오, 별밤지기의 시간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언제나 같았다. 따뜻하고, 차분하고, 그러나 저 깊은 곳에는 헤아릴 수 없는 쓸쓸함을 품고 있는 듯한 목소리. 지원은 그 목소리에 위로받아온 지 오래였다.

“안녕하세요, 별밤지기입니다. 오늘 밤도, 별똥별처럼 스쳐가는 수많은 사연들 속에서, 당신의 밤을 밝혀줄 작은 불빛이 되겠습니다.”

별밤지기의 잔잔한 인사말에 지원은 눈을 감았다. 그녀의 삶은 요즘, 마치 정체된 강물 같았다. 흐르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한 자리에 머물러 버린. 문득 과거의 한 장면이 필름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때 내가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후회는 언제나 가장 아름다운 순간에 찾아와 가장 아픈 기억을 덧칠했다.

별밤지기는 잔잔한 클래식 음악 한 곡을 소개한 후, 한 통의 사연을 읽기 시작했다. 목소리에는 평소보다 더 깊은 울림이 배어 있었다.

“익명의 청취자께서 보내주신 사연입니다. ‘별밤지기님, 저는 오늘 문득 과거의 저를 만나 이야기해주고 싶었습니다. 왜 그때 용기를 내지 못했느냐고. 왜 한 발짝 더 다가서지 못했느냐고. 제 마음이 이토록 선명하게 그 사람을 기억하고 있는데, 왜 그 순간에는 침묵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때의 저는 너무 어렸을까요? 아니면 너무 두려웠을까요? 지금 와서 후회해도 소용없다는 걸 알지만, 밤마다 저를 찾아오는 그 ‘만약’이라는 질문에 답을 할 수가 없습니다.’”

지원에게는 익명의 사연이 곧 자신의 이야기 같았다. 민준과의 마지막 만남. 그때 그녀는 무엇이 그리 두려웠을까. 어쩌면 그저 그 순간을 붙잡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끝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침묵함으로써 영원히 끝을 유보하려 했는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그녀는 민준이 먼저 손을 내밀어주기를 바랐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민준은 침묵했고, 그녀 역시 침묵했다. 그렇게 둘의 인연은 흐릿한 안개처럼 흩어졌다.

‘만약 그때, 내가 붙잡았더라면….’
‘만약 그때, 그가 나를 불러 세웠더라면….’

지원에게도 밤마다 찾아오는 그 ‘만약’이라는 질문은 가혹한 현실보다 더한 무게로 그녀를 짓눌렀다. 라디오 속 별밤지기의 목소리가 그녀의 내면을 꿰뚫고 들어오는 것 같았다. 그녀는 눈을 떴다. 흐릿해진 시야 너머로 탁상시계의 숫자가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새벽 1시 37분.

별밤지기는 잠시 침묵했다. 공기 중에 떠도는 듯한 정적이 지원의 가슴을 더욱 조여 왔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이 사연을 읽으면서, 저 역시 한때 그랬던 제가 떠올랐습니다. 과거의 ‘만약’이라는 질문은 때로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죠. 하지만 여러분, 밤하늘의 별을 보십시오. 수억 광년 전 사라진 별의 빛이 여전히 우리에게 도달하여 밤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 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지만, 그 빛은 여전히 우리에게 과거의 아름다움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기억 속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쩌면 이미 사라진, 만질 수 없는 과거일지라도, 그 기억들이 남긴 빛은 우리 삶의 방향을 비춰주는 등대가 될 수 있습니다. 그 빛을 보며,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 그리고 어디로 가야 할지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빛을 원망하거나 붙잡으려 하기보다는, 그 빛을 통해 현재의 자신을 이해하고,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거의 선택으로 이루어진 현재를 살아가지만, 그 현재 속에서 새로운 선택을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별밤지기의 목소리는 마치 새벽녘의 이슬처럼 촉촉하고 부드러웠다. 지원은 그제야 뜨거운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막아왔던 감정의 댐이 무너져 내리자, 봇물처럼 터져 나오는 슬픔과 후회, 그리고 알 수 없는 안도감이 뒤섞여 그녀를 집어삼켰다.

흐느낌이 잦아들자, 별밤지기의 목소리는 어느새 다음 곡을 소개하고 있었다. 나지막한 피아노 선율이 흘러나왔다. 멜로디는 잔잔했지만, 그 안에 담긴 감정은 깊은 강물처럼 유유히 흘렀다. 지원은 눈물을 닦았다. 더 이상 ‘만약’이라는 질문에 고통받고 싶지 않았다. 민준과의 기억은 그녀에게 아름다운 별빛으로 남을 것이다. 사라졌지만, 여전히 그녀의 밤을 밝혀주는.

그녀는 이제 그 빛을 보며 앞으로 나아갈 준비를 해야 했다. 과거의 나를 원망하는 대신, 지금의 나를 보듬고, 내일의 나를 위해 한 발짝 내딛을 용기를 찾아야 했다. 지원은 고개를 들어 창밖을 내다보았다. 희미하게 동이 트기 시작하는 하늘에, 아직은 별 몇 개가 선명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사라지지 않을 별무리처럼, 그녀의 마음속에도 새로운 희망의 빛이 피어나는 것 같았다.

“오늘 밤, 당신의 마음속에 빛나는 별들을 기억하세요. 그리고 그 별들이 당신의 길을 밝혀주기를 바랍니다. 별이 빛나는 밤의 라디오, 별밤지기였습니다. 편안한 밤 되세요.”

별밤지기의 마지막 인사가 공중에 흩어졌다. 지원은 라디오를 끄지 않고, 새벽을 알리는 듯한 새소리가 들려올 때까지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녀의 마음은 여전히 아련했지만, 왠지 모르게 한결 가벼워진 듯했다. 빛나는 별 아래,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이제 그 하루를 마주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