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어스름이 채 가시지 않은 시각, 봉평리 이장 김만덕 씨의 하루는 언제나 우렁찬 기합 소리와 함께 시작됐다. “좋~아! 오늘도 화이팅!” 그의 목소리는 아직 잠든 산등성이를 깨우듯 퍼져나갔다. 쌀쌀한 가을 공기가 허파 가득 차오르고, 마당 가득 떨어진 붉은 감잎들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경쾌했다. 마당 한켠의 오래된 감나무에는 늦가을 서리를 맞고 더욱 달콤해진 홍시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만덕 이장은 그 감들을 올려다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저 감나무처럼, 봉평리도 넉넉하고 붉게 익어가는 중이었다.
세수를 마치고 뜨거운 보리차 한 잔을 마시자, 몸 안에 온기가 번져왔다. 늘 그렇듯 아침 식사 전 마을 한 바퀴를 도는 것이 그의 루틴이었다. 낡았지만 튼튼한 점퍼를 걸치고 문을 나서자, 동네 어귀에서 흘러나오는 구수한 된장찌개 냄새와 장작 타는 냄새가 섞여 고향의 정취를 물씬 풍겼다. 만덕 이장은 느릿한 걸음으로 걷다 멈춰 서서 마을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저 멀리 푸른 산자락 아래 옹기종기 모여 있는 지붕들은 마치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느껴졌다. 그의 눈길이 박 할머니 댁 감나무에 닿았다.
박 할머니 댁 감나무는 유독 크고 탐스러웠다. 다른 집 감나무들보다 높이 뻗어 올라간 가지에는 주황빛 감들이 보석처럼 박혀 있었다. 그런데 평소 같으면 진작 수확을 끝냈을 감들이 그대로 달려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비바람에 떨어진 감들이 마당에 나뒹굴고, 몇몇은 가지 끝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었다. 박 할머니는 연세가 많으셔서 사다리를 타고 오르기 어려울 터였다. 아들 내외는 도시에서 바쁘게 살아가니, 아마도 감 수확을 미루고 계시는 듯했다. 만덕 이장의 마음 한켠에 작은 먹구름이 드리워졌다. 내일부터는 비 소식도 있는데, 저 많은 감들이 그대로 떨어지거나 얼어버리면 어쩌나.
만덕 이장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르신들도 참… 나에게 한마디라도 하지.” 그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봉평리 이장으로서 마을 어르신들의 작은 불편함 하나까지도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그의 마음속에는 이미 해결책이 그려지고 있었다. 아침 식사 후, 곧장 마을 회관으로 향했다. 문을 열자마자 이웃집 순이 엄마와 철수 아빠가 벌써 나와 있었다. “이장님, 안녕하셨어요?” “오 이장님, 오늘도 부지런하시네!” 따뜻한 인사말이 오갔다.
“박 할머니 댁 감나무 좀 보게. 감들이 그대로 달려 있더구먼. 내일 비 소식도 있고 해서 내가 좀 걱정이 돼서 말이야.” 만덕 이장이 말하자, 순이 엄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오며 가며 봤는데, 할머니 혼자 하시긴 힘드실 거예요. 아드님도 바쁘신가 보더라고요.” 철수 아빠가 말했다. “이장님, 그럼 우리 점심 먹고 다 같이 가서 좀 따드리면 어때요? 저도 농한기라 시간 괜찮습니다.”
만덕 이장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옳지! 그게 바로 봉평리 정신이지! 역시 우리 동네 사람들밖에 없어!” 그는 당장 마을 스피커를 통해 방송을 내보냈다. “주민 여러분, 이장 김만덕입니다. 오늘 오후 1시부터 박순옥 할머니 댁 감 수확을 도울 분들을 모집합니다! 따뜻한 마음을 나누실 분들은 마을 회관 앞으로 모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쩌렁쩌렁 울리며 마을 곳곳에 퍼져나갔다.
점심 식사를 마치자마자, 마을 회관 앞에는 삼삼오오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젊은 청년들부터 중년의 아낙들까지, 열댓 명은 족히 되어 보였다. 만덕 이장은 튼튼한 사다리와 긴 장대를 챙겨 들고 선두에 섰다. “자, 다들 안전 조심하고! 박 할머니 좋아하실 생각하니 벌써부터 기분이 좋구먼!”
박 할머니 댁에 도착하자, 할머니는 마루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고 계셨다. 마을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오는 모습을 보시곤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셨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인고?” 만덕 이장은 허허 웃으며 할머니께 다가갔다. “할머니, 감이 너무 탐스러워서 저희가 감 훔치러 왔습니다! 농담이고요, 할머니 감 떨어지기 전에 저희가 좀 따드리려고요. 내일 비 소식도 있고 해서요.”
할머니의 얼굴에 감격과 미안함이 교차했다. “아이고, 이 귀한 분들이 다 무슨 고생이람. 내가 말씀이라도 드렸어야 하는데… 송구스럽고 고맙네.” 할머니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만덕 이장은 할머니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무슨 말씀을요. 저희 봉평리는 한 가족 아닙니까! 다 같이 사는 동네에서 이 정도야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윽고 마을 사람들은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몇몇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능숙하게 감을 따냈고, 몇몇은 떨어진 감을 주워 담았다. 아이들도 제법 큰 바구니를 들고 감을 나르며 거들었다. 감나무 아래에는 온 마을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가득했다. 만덕 이장은 키가 큰 철수 아빠에게 장대를 건네주고, 자신은 땅에 떨어진 감들을 조심스럽게 골라내며 상태를 살폈다. 흠집이 없는 감들은 따로 모아 홍시를 만들었고, 약간 상한 감들은 곶감으로 만들기로 했다.
어느덧 주황빛 감들이 수북하게 쌓여갔다. 감을 따는 동안, 만덕 이장은 박 할머니 옆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할머니는 젊은 시절 감나무를 심었던 이야기, 자식들을 키우며 이 감나무 아래에서 겪었던 소소한 추억들을 들려주셨다. 할머니의 주름진 얼굴에는 지나온 세월의 흔적과 함께 따뜻한 미소가 피어났다.
“이장님… 이 동네가 참 좋수다. 이렇게 다들 내 일처럼 나서주니, 혼자 살아도 외롭지가 않어.” 할머니의 말에 만덕 이장의 가슴이 뭉클해졌다. 이 작은 마을이,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큰 울타리가 되어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문득 이장이라는 자신의 역할에 대해 다시금 생각했다. 그저 행정적인 업무를 처리하는 것을 넘어, 마을 사람들의 마음과 마음을 잇는 끈이 되어주는 것. 그것이 바로 자신의 가장 중요한 임무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해가 서산으로 기울고 붉은 노을이 마을을 감쌀 무렵, 박 할머니 댁 감나무는 어느새 홀가분해져 있었다. 바구니 가득 쌓인 감들은 할머니의 창고로 옮겨졌고, 곶감으로 만들 감들은 덕장에 가지런히 걸렸다. 할머니는 고생한 마을 사람들을 위해 따뜻한 생강차와 갓 구운 고구마를 내오셨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고구마를 호호 불어 한입 베어 물자, 달콤하고 포근한 맛이 온몸을 감쌌다. 온종일 감을 따느라 조금은 지쳤던 몸이 사르르 녹아내리는 듯했다.
만덕 이장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할머니, 이제 감 걱정은 뚝 하시고 편히 쉬세요! 맛있는 홍시 드시면서 올 겨울 건강하게 보내시고요!” 할머니는 만덕 이장의 손을 잡으며 연신 고맙다는 말을 반복하셨다. “이장님 덕분에 살았다, 정말 덕분에 살았어.”
집으로 돌아오는 길, 만덕 이장의 발걸음은 한없이 가벼웠다. 붉게 물든 하늘을 보며 그는 생각했다. 오늘 하루, 그는 그저 감을 따는 것을 도왔을 뿐이지만, 그 과정에서 박 할머니에게는 따뜻한 위로와 기쁨을, 마을 사람들에게는 함께 나누는 공동체의 의미를 선물했다는 것을. 비록 작은 일이었을지라도, 그 안에 담긴 마음은 결코 작지 않았다.
내일 또 어떤 일이 봉평리를 찾아올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만덕 이장은 확신했다. 이 따뜻하고 유쾌한 마음들이 모인다면,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넉넉하게 이겨낼 수 있을 거라고. 그의 가슴에는 또 다른 봉평리의 하루를 맞이할 뜨거운 열정과 사랑이 가득 차올랐다. 그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자신의 낡은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붉은 감잎들이 바람에 살랑이며 그를 반기는 듯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