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파는 상점 – 제905화

고요는 캔버스 위에서 굳어버린 물감처럼 지아의 삶에 들러붙어 있었다. 한때 태양보다 뜨겁게 타올랐던 그녀의 붓놀림은 이제 재처럼 차갑게 식어버린 기억만을 더듬을 뿐이었다. 그녀는 더 이상 붓을 들어도 빛을 그릴 수 없었다. 새벽녘 여명의 찬란함, 해 질 녘 노을의 애틋함, 심지어 한낮의 무심한 햇살조차 그녀의 눈에서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세상은 온통 흐린 회색빛이었고, 그 회색은 그녀의 그림을, 그녀의 영혼을 잠식하고 있었다.

“선생님, 정말 이대로 포기하실 겁니까?”
오래된 화실의 낡은 의자에 앉아 한숨만 내쉬는 지아에게 조수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지아는 아무 말 없이 창밖을 응시했다.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은 곧 비를 뿌릴 듯 축축하게 내려앉아 있었다. 그때, 조심스럽게 건넨 조수의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혹시… ‘그 상점’에 대해 들어보셨습니까?”

지아의 심장이 아주 미세하게, 하지만 확실하게 반응했다. ‘그 상점’. 잊고 있던 전설 같은 이야기. 아무도 정확한 위치를 모르지만, 절망의 끝에 다다른 자들이 찾아 헤맨다는 곳. 꿈을 파는 상점.

“헛된 소리….” 그녀는 중얼거렸지만, 이미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작은 불꽃 하나가 간절하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며칠 밤낮을 헤매고, 잊혀진 골목과 그림자 진 거리들을 스쳐 지난 후, 지아는 마침내 그곳에 다다랐다. 낡은 상점이었다. 간판도, 문패도 없었다. 다만 짙은 고동색 나무문에 낡은 황동 손잡이만이 빛바랜 세월의 흔적을 말해주고 있었다. 문을 열자, 오래된 나무 삐걱이는 소리가 정적을 깼다.

내부는 기묘한 빛으로 가득했다. 천장에는 수많은 유리병들이 매달려 있었고, 그 안에는 형언할 수 없는 색깔의 안개가 유영하고 있었다. 어떤 병에서는 따뜻한 오렌지빛이, 어떤 병에서는 차가운 푸른빛이 흘러나왔다. 그것들은 마치 살아있는 숨결처럼 공간을 채웠다. 먼지 냄새와 함께 알 수 없는 꽃향기가 섞여 은은하게 퍼졌다.

“어서 오십시오.”
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들려왔다. 상점 주인은 짙은 청색의 도포를 입은 노인이었다. 그의 얼굴은 깊은 주름으로 가득했지만, 눈빛은 형용할 수 없는 깊이와 지혜를 담고 있었다. 그는 지아를 꿰뚫어 보는 듯했다.

“무엇을 찾으러 오셨는지, 알고 있습니다.” 노인이 잔잔하게 말했다. “빛을 잃은 화가여, 잃어버린 새벽의 빛을 되찾고 싶으신가요?”

지아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심장은 천둥처럼 울리고 있었다.

“잃어버린 빛, 사라진 영감. 그것은 단순한 재능이 아닙니다. 그것은 당신의 영혼에 뿌리내렸던 하나의 우주였습니다.” 노인은 걸음을 옮겨 수많은 유리병들이 진열된 선반 앞으로 다가섰다. “이곳에서 우리는 꿈을 사고팝니다. 기억을, 희망을, 때로는 잃어버린 감각까지도.”

그의 손가락이 가늘고 긴 유리병 하나를 가리켰다. 병 안에는 마치 살아있는 새벽의 공기처럼 투명하고 영롱한, 금빛과 은빛이 뒤섞인 안개가 춤추고 있었다. 그것을 보는 순간, 지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잊고 지냈던 어떤 감각이, 그녀의 붓끝에서 터져 나왔던 황홀경이 아득하게 되살아나는 듯했다.

“이것이… 당신이 찾던 새벽의 빛입니다. 당신의 붓끝을 다시 깨울, 사라진 여명의 찬란함.”

지아는 병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녀의 그림에 다시 생명을 불어넣을, 그녀의 영혼을 구원할 유일한 열쇠 같았다.

“얼마입니까?” 지아의 목소리는 갈라지고 떨렸다.

노인은 희미하게 웃었다. “꿈의 대가는 언제나 꿈입니다. 당신은 무엇을 포기하실 의향이 있으신가요?”

지아는 당황했다. 돈이 아니라니. 그녀는 자신의 모든 재산을 내어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당신에게서 사라진 새벽의 빛은, 한때 당신의 모든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되찾으려면, 당신 또한 그에 상응하는 무언가를 내어주어야 합니다. 당신의 영혼에서 가장 소중한 것 중 하나를.” 노인의 시선이 다시 지아의 눈동자를 꿰뚫었다. “당신은 ‘황혼의 그림자’를 가지고 있습니다.”

황혼의 그림자? 지아는 의아했다.

“당신의 그림이 가장 처연하고 아름다웠을 때, 당신은 해 질 녘 노을의 슬픔과 평온함을 동시에 담아냈습니다. 그 순간의 기억들, 스러져가는 하루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능력, 어둠이 찾아오기 전 마지막 빛에 대한 애틋함. 그것이 바로 황혼의 그림자입니다.” 노인의 목소리가 계속되었다. “만약 당신이 이 새벽의 빛을 취한다면, 당신은 더 이상 황혼을 볼 수 없을 겁니다. 해 질 녘 노을의 장엄함과 애수를 느낄 수 없을 테지요. 당신의 세상에는 오직 새벽만이 존재할 것입니다. 시작만이, 떠오름만이.”

지아는 충격에 휩싸였다. 황혼. 그녀에게 황혼은 단순한 시간이 아니었다. 그것은 상실의 아픔을 달래주던 고요한 위안이었고, 떠나간 사람과의 마지막 약속 같은 순간이었다. 그녀의 초기 작품들 중 가장 깊은 울림을 주었던 것들은 모두 황혼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황혼의 그림자’를 포기하고 ‘새벽의 빛’을 얻는다고? 그것은 마치 자신의 일부를 떼어내는 것과 같았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그녀는 완전히 무너질 것이었다. 더 이상 그림을 그리지 못한다면, 그것 또한 살아있는 죽음과 다름없었다.

“선택하세요, 화가여.” 노인의 목소리가 고요한 상점 안에서 메아리쳤다. “잃어버린 새벽을 되찾을 것인가, 아니면 황혼의 아름다움과 함께 어둠 속에 머물 것인가.”

지아의 눈은 다시 유리병 속 금빛 안개로 향했다. 그 안개 속에서 그녀는 자신이 가장 찬란했던 순간을 보았다. 거침없이 캔버스 위를 유영하던 붓, 색색의 물감들이 생명처럼 뿜어져 나오던 환희. 그 모든 것이 바로 저 병 안에 담겨 있는 것 같았다.

두려움과 함께 깊은 갈망이 그녀를 집어삼켰다.

“저… 저것을 주십시오.” 그녀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았지만, 결의에 차 있었다. “황혼을… 황혼의 그림자를… 포기하겠습니다.”

노인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그는 손을 뻗어 진열된 다른 병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 병 안에는 보랏빛과 붉은빛이 뒤섞인, 스러져가는 노을 같은 안개가 담겨 있었다. 노인은 그 병을 지아에게 내밀었다.

“이제… 당신의 황혼은 제가 가져가겠습니다.”

지아는 알 수 없는 허전함을 느꼈지만, 동시에 유리병 속 새벽의 빛이 주는 강렬한 유혹에 사로잡혔다. 노인은 그녀에게 다른 작은 병을 건넸다. 그것은 그녀가 선택한 ‘새벽의 빛’이었다. 병마개를 열자, 투명한 빛의 안개가 작은 숨결처럼 피어올라 지아의 코끝을 스쳤다. 순간, 그녀의 눈앞에서 세상의 색깔이 폭발하듯 되살아났다. 회색빛으로 물들었던 벽이 따뜻한 아이보리색으로 빛나고, 상점 안의 모든 유리병들이 전보다 훨씬 더 선명하고 생생한 빛을 뿜어냈다.

그녀의 가슴 속에서 잊고 지냈던 뜨거운 무언가가 용솟음쳤다. 붓을 들고 싶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달려나가 이 모든 색깔과 빛을 캔버스에 담고 싶었다. 그녀의 그림에 다시 여명이 찾아온 것이었다.

상점을 나서는 지아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세상은 온통 새로운 빛으로 가득했다. 거리의 나무들은 그 어느 때보다 푸르게 빛났고, 흐린 하늘조차도 그녀의 눈에는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희망처럼 보였다. 하지만 문득, 하늘을 올려다본 그녀의 시선이 흔들렸다.

오후의 햇살이 기울고 있었다. 해가 지평선 아래로 사라지는 그 찰나, 온 세상을 붉게 물들이며 마지막 고별을 고하는 장엄한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지만… 지아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그녀의 눈에는 그저 낮이 밤으로 바뀌는, 무미건조한 시간의 흐름만이 보일 뿐이었다. 가슴속에 솟구치는 환희의 빛 뒤편에서, 아주 깊은 곳에서부터 알 수 없는 공허함이 서서히 번져오기 시작했다. 그녀는 이제 영원히 새벽만을 사랑할 것이었다. 다시는 노을의 슬픔을, 그 고요한 아름다움을 이해할 수 없을 테였다.

지아는 자신의 손에 들린 작은 병을 내려다보았다. 그 안에서 여명의 빛은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빛은… 어딘가 차갑고 외로웠다.

그녀는 비로소 깨달았다. 꿈을 파는 상점은, 잃어버린 것을 돌려주는 대신, 언제나 가장 소중한 다른 무언가를 가져간다는 것을. 그리고 그 대가가, 때로는 얻은 것만큼이나 고통스러울 수 있다는 것을.

지아는 캔버스가 기다리는 화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붓은 다시 빛을 담을 수 있게 되었을까? 아니면,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황혼의 그림자가 그녀의 그림에도 영원한 결핍으로 남게 될까? 새로운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 새벽은, 어딘가 쓸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