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첫사랑을 찾는 탐정 – 제906화

탐정 지훈의 심장이 낡은 시계추처럼 느릿하게, 그러나 묵직하게 울렸다. 906번째 챕터에 이르도록, 그의 발걸음은 한결같이 그녀, 은수를 향해 있었다. 수많은 계절이 바뀌고 얼굴 없는 그림자들과 씨름하며 달려온 시간들이 그의 눈가에 깊은 골을 새겼지만, 그 그림자 속에서도 여전히 빛나는 단 하나의 희망이 그를 지탱하고 있었다.

오래된 서랍 속 그림자

지훈은 낡은 나무 상자 안에 고이 잠들어 있던 훼손된 사진 한 장을 꺼냈다. 빛바랜 사진 속에는 앳된 얼굴의 은수가 미소 짓고 있었다. 그 미소는 스무 해가 넘도록 그의 꿈을 지배했고, 밤잠을 설치게 하는 지독한 갈증이 되었다. 최근 그는 은수의 어릴 적 친구였던 ‘혜진’을 통해 충격적인 단서를 얻었다. 은수가 단순한 실종이 아닌, 어떤 거대한 음모에 휘말렸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중심에, 은수의 부모님과 깊은 사업적 연관이 있었던 ‘명성 그룹’의 윤 회장이 있다는 것이었다.

“윤 회장… 그는 대체 무엇을 숨기고 있는 걸까.”

지훈은 낮게 중얼거렸다. 윤 회장은 은수의 실종 직후, 그녀의 부모가 급작스러운 사고로 사망하면서 모든 유산을 관리하게 된 인물이었다. 그리고 은수에 대한 어떤 질문에도 늘 ‘모른다’, ‘연락이 끊겼다’로 일관해왔다.

침묵의 저택, 어둠의 그림자

지훈은 윤 회장의 저택 앞에 섰다. 겹겹이 쌓인 높은 담벼락과 굳게 닫힌 철문은 마치 세상과 단절된 요새 같았다. 며칠간의 잠복 끝에, 그는 윤 회장이 매주 화요일 저녁, 홀로 인근 복지관에 기부 물품을 전달하러 간다는 것을 알아냈다. 오늘이 바로 그 화요일이었다.

어둠이 깔리고, 저택의 정문이 열리며 검은색 세단 한 대가 조용히 빠져나왔다. 지훈은 자신의 차량 시동을 걸고 조심스럽게 그 뒤를 따랐다. 복지관에 도착한 윤 회장이 경호원들을 멀리하고 홀로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지훈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윤 회장님.”

복도 끝에서 불쑥 나타난 지훈의 목소리에 윤 회장은 움찔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순간적으로 당황과 함께 깊은 불쾌감이 스쳤다.

“이 밤중에 웬일이시오? 실례인 줄 아오만, 사적인 용무는 사절입니다.”

“저는 탐정 이지훈입니다. 20여 년 전 실종된 은수에 대해 할 말씀이 있습니다.”

지훈은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윤 회장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는 것을 그는 놓치지 않았다. 노회한 사업가의 표정 뒤에 숨겨진 불안감이 역력했다.

“…은수? 그 아이는 이미 오래전에 연락이 끊긴 지 오래요. 내가 아는 바는 없소.”

윤 회장은 애써 침착한 척했지만, 그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정말입니까? 혜진 씨는 회장님이 은수의 실종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은수 부모님의 유산 처리 과정도 석연치 않은 부분이 많았습니다.”

지훈은 의도적으로 혜진의 이름을 언급했다. 윤 회장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혜진… 그 아이가 쓸데없는 소리를 했군. 어린애들 소꿉장난 같은 이야기에 휘둘리지 마시오, 탐정 양반. 나는 그저 자비로운 마음으로 친구의 딸을 도왔을 뿐이오.”

“자비심으로… 은수의 흔적을 모두 지우고, 그녀의 삶에서 회장님의 그림자만 남기셨단 말입니까?”

지훈의 날카로운 질문에 윤 회장은 더 이상 여유를 유지하지 못했다. 그의 눈빛은 순식간에 차갑게 변했다.

“그만 두시오! 더 이상 쓸데없는 호기심으로 나를 자극하지 마시오. 내 경고는 단 한 번뿐이오.”

새로운 이름, 지워진 기억

윤 회장이 돌아서려 하자, 지훈은 마지막 카드를 꺼냈다.

“은수의 부모님이 남기신 오래된 일기장을 찾았습니다. 그 안에는 은수가 힘들어했던 일들과, 회장님께 도움을 요청하려 했던 흔적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은수가 입양된 후 ‘이서연’이라는 이름으로 새 삶을 살고 있다는 기록도요.”

‘이서연’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윤 회장의 몸이 굳어버렸다. 그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창백해졌고, 눈은 공포와 분노로 가득 찼다.

“어떻게… 어떻게 그걸…!”

윤 회장은 지훈의 멱살을 잡으려 했으나, 늙고 병든 몸은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떨리는 손으로 허공을 휘저을 뿐이었다.

“은수는, 아니 서연 씨는 어디에 있습니까? 그녀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20년 전의 진실을 알고 싶습니다. 그녀는 왜 ‘이서연’이 되어야만 했습니까?”

지훈의 목소리는 절규에 가까웠다. 그의 가슴은 오랫동안 억눌렸던 질문들로 터져버릴 것 같았다. 윤 회장은 숨을 헐떡이며 벽에 기댔다. 그의 눈빛은 이제 체념과 함께 깊은 슬픔을 담고 있었다.

“그 아이는… 평범한 삶을 살고 있소. 행복하게… 더 이상 찾지 마시오. 당신이 알게 되면… 모두가 불행해질 뿐이오.”

“불행이라뇨? 20년 동안 그녀를 잊지 못하고 찾아 헤맨 제가, 그녀를 찾는 것이 불행이라고요?”

지훈의 말에 윤 회장은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한 문장을 내뱉었다.

“서연이는… 모든 기억을 잃었소. 20년 전 그 사건으로 인해… 과거의 자신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오. 그리고… 지금은… 나의 아들이자 나의 사업을 이을 한정우 이사와 결혼할 예정이오.”

지훈의 세상이 순간 정지했다. 은수가 기억을 잃었다는 말도, 그녀가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될 예정이라는 말도, 그의 심장을 날카로운 칼날로 찢어발기는 듯했다. 20년의 세월, 수많은 단서, 끝없는 추적의 끝에 마주한 진실은 이토록 잔인하고 처절한 것이었던가.

그의 눈앞에는 행복하게 웃던 어린 은수의 얼굴이, 그리고 기억을 잃고 다른 이름으로 다른 삶을 살아가는 ‘이서연’의 그림자가 동시에 아른거렸다. 그는 과연 이 진실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초래한 윤 회장의 거대한 비밀은 과연 무엇일까. 지훈은 자신이 서 있는 이 복도, 이 세상이 한없이 차갑게만 느껴졌다.

그의 손에 들린 은수의 낡은 사진이 더욱 차갑게 식어가는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