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모퉁이 작은 빵집의 기적 – 제335화

잊혀지지 않는 온기

산모퉁이 작은 빵집에는 유독 쓸쓸함이 내려앉은 날이 많았다. 창밖으로는 가을비가 촉촉이 내리고 있었고, 빵집 안은 갓 구운 호밀빵의 구수한 내음과 따뜻한 커피 향으로 가득했지만, 그 온기마저도 누군가의 그림자를 완전히 지워주지는 못하는 듯했다.

오늘따라 유난히 고개를 떨군 채 빵집 문을 열고 들어선 이는 지훈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지난 몇 년간 서서히 기억의 강을 건너고 계셨다. 이제는 아들의 얼굴조차 가끔은 낯설어 하는 날이 더 많아졌다. 지훈은 매일 아침 어머니가 좋아하셨던 빵을 사러 오곤 했지만, 그 빵을 건넬 때의 어머니의 눈빛은 점점 더 희미해져만 갔다.

“어서 오세요, 지훈 씨. 오늘은 비가 오네요.” 주인 미나 씨는 언제나처럼 따뜻한 미소로 그를 맞았다. 하지만 그녀의 예리한 눈은 지훈의 깊어진 눈가의 그늘을 놓치지 않았다.

“네… 오늘은 어머니가 아침부터 조금 힘들어하셔서요.” 지훈은 겨우 목소리를 냈다. 그의 손에는 어머니가 가장 좋아하셨던 팥앙금빵이 들려 있었지만, 과연 어머니가 이 빵을 기억하실지 의문이었다.

미나 씨는 말없이 진한 커피 한 잔을 건네며, 갓 구운 빵들을 천천히 둘러보게 했다. 그리고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주방으로 들어가 오래된 레시피 노트를 뒤적였다. 빵집 한편에는 언제나처럼 조용히 자리를 지키는 할머니 손님들이 모여 앉아 있었다. 그들의 눈빛에는 오랜 세월이 담겨 있었고, 어쩌면 그들 역시 비슷한 아픔을 겪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지훈의 마음을 스쳤다.

한참 뒤, 미나 씨는 따뜻한 김이 피어오르는 쟁반 하나를 들고 나왔다. 쟁반 위에는 지금껏 보지 못했던 종류의 빵이 놓여 있었다. 겉은 투박하고 검은 빛을 띠었지만, 은은하게 풍기는 달콤하고 고소한 향은 묘하게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이건, 예전 어머님들이 즐겨 드시던 ‘기억의 흑임자 빵’이에요. 흑임자가 몸에도 좋고, 옛 맛이 진해서 어머님이 좋아하실지도 모르겠어요.” 미나 씨는 지훈의 눈을 응시하며 조용히 말했다.

지훈은 조심스럽게 빵 하나를 들었다. 따뜻한 온기가 손끝으로 전해졌다. 어딘가 모르게 어린 시절, 할머니가 구워주시던 투박한 빵과 닮아 있었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미나 씨의 권유에 따라 빵 한 조각을 베어 물었다. 입안 가득 퍼지는 고소한 흑임자 향과 은은한 단맛이 익숙하면서도 신선했다. 잊고 있던 아련한 옛 추억들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날 오후, 지훈은 어머니의 병실로 향했다. 어머니는 여느 때처럼 창밖만 응시하고 계셨다. 지훈은 조심스럽게 미나 씨가 싸준 흑임자 빵을 내밀었다.

“어머니, 이거 드셔보세요. 산모퉁이 빵집에서 새로 나온 빵인데, 옛날 맛이 난대요.”

어머니의 눈빛은 여전히 흐릿했다. 하지만 빵을 건네받는 순간, 어머니의 손끝이 아주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지훈은 놓치지 않았다. 어머니는 빵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그리고 그 순간,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어머니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흐릿했던 눈동자에 순간적으로 생기가 돌았다. “어… 이거… 할머니가 어렸을 때 구워주시던… 그 빵 맛인데… 지훈아…?”

지훈은 숨을 멈췄다. 얼마 만에 들어보는 어머니의 온전한 목소리였는지, 얼마 만에 보는 어머니의 또렷한 눈빛이었는지. 그의 눈가에 뜨거운 것이 고였다. 그 흑임자 빵 한 조각이, 잊혀진 기억의 문을 잠시나마 열어준 듯했다.

그것은 완벽한 치유는 아니었다. 하지만 지훈에게는 충분히 기적이었다. 빵 하나가 전해준 온기, 그리고 그 온기가 불러온 찰나의 연결. 산모퉁이 작은 빵집은 오늘도, 그렇게 누군가의 잊혀지지 않는 희망을 구워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