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톱 아래 숨겨진 이름
강지훈의 낡은 승용차가 거친 비포장도로를 미끄러지듯 달렸다. 해안가를 따라 이어진 길은 낡고 녹슨 표지판 하나 없는 망각된 시간의 통로 같았다. 며칠 밤낮으로 이어온 추적 끝에, 그가 찾아낸 단서는 낡은 사진 한 장과 뒷면에 희미하게 적힌 오래된 여관의 이름뿐이었다. ‘해무가 머무는 집’이라는 낭만적인 이름과는 달리, 도착한 곳은 시간이 멈춘 듯한 작은 포구 마을이었다. 낡은 어선 몇 척이 파도에 흔들리고, 짠 내 섞인 바람이 그의 뺨을 스쳤다. 이곳은 윤서연이 사라진 후, 한때 머물렀던 곳이라는 실낱같은 희망이 그를 여기까지 이끌었다.
차에서 내린 지훈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폐부 깊숙이 파고드는 바다 내음과 옅은 갯벌 냄새가 묘한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서연과 함께 여름 바다를 찾았던 기억, 파도 소리에 섞여 들리던 그녀의 웃음소리가 귓가를 맴도는 듯했다. 914번째 발걸음. 수많은 좌절과 미약한 희망 속에서 그는 이 걸음을 멈출 수 없었다. 그의 심장은 고통스럽게 죄어오는 동시에, 막연한 기대감으로 부풀어 올랐다.
마을은 적막했다. 이따금 고양이 한 마리가 담벼락 위를 유유히 걷거나, 낡은 창문 너머로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올 뿐이었다. 그는 주머니 속 사진을 만지작거리며 ‘해무가 머무는 집’이라는 여관을 찾았다. 해안선을 따라 한참을 걷자, 낡은 나무 간판이 겨우 형체를 유지하고 있는 2층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창문마다 오래된 먼지가 내려앉아 있었고, 외벽은 바닷바람에 깎여나간 흔적으로 가득했다.
지훈은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적막을 깼다. 내부는 생각보다 깔끔했지만, 켜켜이 쌓인 세월의 흔적은 숨길 수 없었다. 카운터 뒤편에서 나직한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마른 체구의 할머니 한 분이 안경 너머로 지훈을 올려다봤다. 주름진 얼굴에 어린 경계심이 역력했다.
“누구를 찾아오셨소?”
“안녕하세요. 혹시 이곳이 ‘해무가 머무는 집’이 맞습니까?”
“그럼요. 이 촌구석에 여관이라곤 여기뿐인데.”
지훈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의 눈은 할머니 뒤편 벽에 걸린 낡은 사진들과 먼지 쌓인 진열장을 훑고 있었다. 20년 전 서연이 이곳에 머물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손끝이 저릿했다.
“제가 혹시… 윤서연이라는 분을 아시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한 20년 전쯤, 이곳에 며칠 머물다 가셨을지도 모른다고 해서요.”
할머니의 눈빛에 미세한 변화가 스쳤다. 하지만 이내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글쎄요. 워낙 오래된 일이라. 스쳐 지나간 손님이 한둘도 아니고. 나는 그런 이름은 기억나지 않네요.”
지훈은 실망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혹시 그분이… 작은 수첩을 늘 가지고 다니고, 밤에는 창가에 앉아 바다를 오래 바라보곤 했다고 합니다. 유난히 바다를 좋아했다고….”
그의 말에 할머니의 시선이 흔들렸다. 그녀는 카운터 아래 서랍을 잠시 바라보았다. 지훈은 그 미묘한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다. 긴 세월 동안 수많은 거짓말과 침묵을 깨부수며 얻은 직감이었다.
“여사님, 저는 그분을 꼭 찾아야 합니다. 제게는 너무나 소중한 사람입니다.” 지훈의 목소리에는 간절함이 묻어났다. 그의 눈빛은 흔들림 없이 할머니를 응시했다.
할머니는 한숨을 쉬더니, 마지못해 서랍을 열었다. 그 안에는 낡은 종이 뭉치와 함께 오래된 손수건으로 감싸인 작은 나무 상자가 들어있었다. 그녀는 상자를 꺼내 지훈의 앞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20년 전, 유난히 눈이 크고 조용했던 젊은 아가씨가 있었지. 이름은… 김지영이라고 했었어.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녀의 눈은 늘 어딘가를 잃어버린 듯했어. 그녀가 떠나기 전, 내게 이것을 맡겼지. 언젠가 다시 찾으러 오겠다고….”
김지영. 서연이 사용했던 가명 중 하나였다. 지훈의 심장이 격렬하게 뛰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나무 상자를 열었다. 상자 안에는 빛바랜 작은 해변 그림과 함께, 누군가의 손때가 묻은 낡은 책 한 권이 들어 있었다.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였다. 첫 페이지에는 서연의 필체로 보이는 익숙한 글씨가 적혀 있었다.
‘길들여진다는 것은 눈물을 흘릴 위험을 무릅쓰는 일이다.’
지훈은 그림을 꺼냈다. 그림은 서연이 학창 시절 즐겨 그리던 방식 그대로, 섬세하면서도 어딘가 슬픔이 어린 바다 풍경이었다. 그리고 그림 뒷면에는 작은 글씨가 쓰여 있었다.
‘이곳에서 떠나… 희망을 찾아.
달이 가장 높이 뜨는 밤,
북쪽 등대 아래,
새로운 이름을 찾을 것이다.’
지훈의 손에서 그림이 파르르 떨렸다. ‘새로운 이름을 찾을 것이다.’ 그 문구는 단순한 전언이 아니었다. 서연이 자신의 과거를 지우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 했음을 암시하는 동시에, 그녀의 여정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희망의 메시지였다. 북쪽 등대. 이 근처에 북쪽 등대가 있었던가?
“고맙습니다, 여사님. 정말… 정말 고맙습니다.” 지훈은 목이 메어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눈물이 핑 돌았다. 20년 만에, 서연의 손길이 닿았던 물건을, 그녀의 글씨를 다시 마주했다는 사실이 그를 압도했다.
할머니는 지훈의 간절한 표정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가씨는… 떠나면서 ‘이제 나를 찾아오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하지만 만약, 단 한 사람이라도 끝까지 나를 찾아온다면… 그때는 그가 나를 용서해 주었으면 좋겠어요.’라고 했지.”
용서. 서연이 무엇을 용서받고 싶었단 말인가? 지훈의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그는 사진 속 해변 그림과 『어린 왕자』를 품에 안고 다시 바닷바람 속으로 나섰다.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하늘 아래, 멀리 북쪽 바다에서 희미한 등대 불빛이 깜빡이는 것 같았다. 그 불빛은 마치 잃어버린 첫사랑을 향한 그의 끝나지 않을 여정을 비추는 길잡이처럼 느껴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