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밤, 산골짜기를 휘감은 안개처럼 모든 소리가 먹먹하게 가라앉은 시간이었다. 작은 오두막의 유리창 너머로 달빛조차 힘없이 스며드는 그곳에서, 지훈과 서연은 마주 앉아 있었다. 낡은 탁자 위 촛불이 위태롭게 흔들리며, 두 사람의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몇 시간 전, 지훈이 털어놓은 모든 진실이 아직도 서연의 귓가에 맴돌았다. 뿌리 깊은 가문의 비극, 오랜 숙명처럼 자신을 얽맨 어둠의 그림자,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어떻게 그녀의 삶까지 집어삼키려 하는지.
서연은 뻣뻣하게 굳은 손으로 찻잔을 들었다. 차는 이미 식었지만, 따스함이 필요했다. 아니, 차가운 찻잔이라도 쥐고 있어야 이 떨림을 감출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의 시선은 지훈에게 닿았다. 늘 강인하고 흔들림 없던 그의 눈동자에는 지금, 짐승 같은 고통과 깊이를 알 수 없는 체념이 뒤섞여 있었다. 어쩌면 그가 이런 눈빛을 보인 것은, 처음 밤기차에서 만났던 그날, 모든 것을 포기한 듯 창밖을 응시하던 그 순간 이후 처음인지도 몰랐다.
“서연아…”
지훈의 목소리가 촛불처럼 가늘게 떨렸다. 그는 손을 뻗어 서연의 손에 닿으려다 멈칫했다. 마치 자신에게 닿는 순간, 그녀마저 삼켜버릴 독이라도 되는 양. 그 주저함이 서연의 심장을 갈랐다.
“다 이해했어, 지훈아.” 서연은 겨우 입을 열었다. “네가 왜 그토록 숨겨왔는지, 왜 나를 밀어내려 했는지… 이제야 알겠어.”
그녀의 목소리는 의외로 차분했다. 오히려 지훈의 얼굴에 더 깊은 절망을 안겨주었다. 차라리 그녀가 소리 지르고, 울고, 그를 비난해주기를 바랐을 것이다. 하지만 서연은 그 모든 비극을 고요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마치 오래전부터 예견된 일인 것처럼.
“이 모든 게 나 때문에 시작된 일이야. 내가 그날 밤, 그 기차에 오르지 않았더라면… 네 삶은 더 이상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았을 거야.” 지훈은 고개를 숙였다. 그의 어깨는 무너져 내리는 듯 보였다. “너를 만나지 말았어야 했어. 너를 사랑하지 말았어야 했어.”
그 말을 듣는 순간, 서연의 가슴 속에서 차가운 응어리가 울컥 치밀었다. 그의 진심을 알기에 더 아팠다. 그의 사랑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스스로를 갉아먹는 칼날이 되어 돌아오는 것을 보는 것이 견딜 수 없었다.
“사랑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서연은 탁자를 짚고 일어섰다. “그럼… 그럼 우리가 밤새도록 나누었던 이야기들은? 서로의 상처를 보듬고 함께 꾸었던 꿈들은? 그 모든 건 다 거짓이었어?”
서연의 눈가에 뜨거운 것이 맺혔다. 그녀는 애써 참고 있던 눈물을 터뜨리지 않으려 입술을 깨물었다.
지훈은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거짓이 아니야. 단 한 순간도 거짓은 없었어. 그래서 더 괴로워. 너를 너무나도 사랑해서… 이 지옥에서 너를 꺼내주고 싶어. 나 혼자 짊어질 수만 있다면… 나는 기꺼이…”
“혼자라고? 지훈아, 이제 와서 혼자 짊어지겠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서연은 소리쳤다. 그녀의 목소리는 오두막의 고요를 흔들었다. “밤기차에서 너를 만난 순간부터, 우리는 이미 한배를 탄 거나 마찬가지였어. 네가 겪는 고통은 곧 나의 고통이었고, 네가 품었던 희망은 나의 희망이었어. 어떻게 이제 와서 나를 혼자 두겠다는 말을 해?”
지훈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두어 걸음 만에 서연에게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그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들어줘, 서연아. 내가 지금부터 하려는 일은… 네가 감당할 수 없을 거야. 너는 이 싸움에서 멀어져야 해. 이 모든 걸 끝내려면… 내가 직접 나서야만 해. 홀로.”
서연은 그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 안에 도사린 결의를 보았다. 그것은 그녀를 향한 사랑이 만들어낸 가장 잔인한 선택이었다. 그녀를 보호하기 위한, 하지만 그녀를 산 채로 찢어놓을 작정인 그런 결의.
“혼자라니… 내가 너를 혼자 보낼 것 같아?” 서연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그 어떤 비명보다 강렬했다. “나는 네가 처음 밤기차에서 내게 말을 걸던 그 순간부터, 이미 너의 세상에 발을 들였어. 네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 너를 지켜보며 네 그림자를 밟아왔다고. 그런데 이제 와서 갑자기 너 혼자 떠나겠다고? 나는 절대로… 절대로 너를 포기하지 않아.”
지훈의 손이 서연의 어깨에서 미끄러져 내려왔다. 그는 그녀의 얼굴을 감쌌다. 그의 엄지손가락이 그녀의 뺨을 쓸었다. 뜨거운 눈물이 그의 손바닥을 적셨다. 서연의 눈에서 흘러나온 것이었다. 그녀의 눈물은 뜨거웠고, 그의 마음을 불태웠다.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잖아…” 지훈은 속삭였다. 그의 목소리에는 절박함과 애통함이 깃들어 있었다. “그렇기에… 너를 살리기 위해… 나는 어떤 선택이든 할 거야. 설령 그것이 나 스스로를 파멸시키는 길이라 할지라도.”
서연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럴 수 없어. 네가 없는 세상은 내게 아무 의미 없어. 함께 가자. 어떤 길이든… 어떤 어둠이 기다리고 있든… 우리는 함께 이겨낼 수 있어.”
지훈은 그녀의 고백에 잠시 흔들리는 듯 보였다. 그의 눈동자에 일렁이던 체념이 한순간 불꽃처럼 타올랐다. 그러나 이내 그 불꽃은 더 깊은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그는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차갑게 식어가는 입술의 감촉이 서연의 심장에 칼날처럼 박혔다.
“미안해, 서연아.” 그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았다. “나는… 더 이상 너와 함께 할 수 없어.”
그 순간, 오두막 바깥에서 희미한 인기척이 들려왔다. 멀리서 들려오는 듯하지만, 예리한 귀를 가진 지훈에게는 분명하게 감지되는 소리였다. 그들의 대화를 엿듣기라도 한 듯, 혹은 그들을 찾아 헤맨 그림자의 움직임처럼. 지훈의 눈빛이 순식간에 차갑게 변했다. 체념과 고통으로 가득했던 그의 얼굴에, 단단한 전사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는 서연을 밀쳐내며 오두막 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서연아, 문 뒤에 숨어. 절대 밖으로 나오지 마.” 그의 목소리는 명령이었다. “이건… 내가 시작한 일이고, 내가 끝내야 할 일이야.”
지훈의 손이 탁자 위에 놓여있던 낡은 사냥칼을 움켜쥐었다. 칼날은 희미한 촛불에도 섬뜩하게 빛났다. 서연은 그의 뒷모습을 보며 얼어붙었다. 그녀의 심장은 찢어지는 듯 아팠지만, 지훈의 결의를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를 보내야만 한다는 것을. 하지만 그의 결정을 따르지 않을 것이라는 맹세 또한 그녀의 눈빛 속에 선명하게 타올랐다.
“지훈아…!” 서연의 비명이 터져 나오기 직전, 지훈은 문을 박차고 나섰다.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은 너무나도 쓸쓸하고 외로워 보였다. 그녀의 절규는 오두막 안에 갇혔고, 바깥에서는 짐승 같은 울부짖음과 함께 쇠붙이가 부딪히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밤의 장막이 모든 것을 집어삼키려는 듯, 오두막은 깊은 어둠 속으로 잠겨들었다. 서연은 문고리를 잡은 채, 그의 목숨과 자신의 운명을 가르는 미지의 싸움을 엿듣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