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눈꽃이 내리던 날의 약속 – 제908화

겨울의 첫눈은 언제나 예고 없이 찾아왔지만, 그날의 눈은 달랐다. 세상의 모든 소리를 삼키며 내려앉는 굵고 무거운 눈발은, 마치 잊고 지냈던 오래된 약속을 상기시키려는 듯 창밖을 온통 하얗게 덮어갔다. 작업실 안, 서연의 손끝은 굳게 얼어붙은 흙덩이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빛을 담는 조각’. 지훈과 함께 꿈꿨던 그 조각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미완성이었다. 그의 손길이 닿아야만 완성될 수 있는 조각.

창문 너머로 보이는 눈 덮인 풍경은 아름다웠지만, 서연의 마음속에는 시린 바람이 불었다. 탁자 위, 오래된 사진 속 열두 살의 서연과 지훈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작은 손으로 눈사람을 만들며, 그들은 반짝이는 눈빛으로 약속했었다. “다음에 첫눈이 이렇게 많이 오는 날, 우리 둘 다 꿈을 이뤘으면 그땐 함께 이 조각을 완성하는 거야.” 어린 시절의 맹세는 순수하고 맑았지만, 그 후 지훈은 소리 없이 사라졌다. 그의 가족에게 닥친 불행한 사건 이후, 지훈의 그림자마저 세상에서 지워진 듯했다.

서연은 손에 든 흙덩이를 내려놓고 뜨거운 김이 오르는 찻잔을 들었다. 따뜻한 온기가 손끝을 타고 온몸으로 퍼졌지만, 가슴 한구석의 허기는 채워지지 않았다. 그녀는 이제 명망 높은 조각가였다. 그녀의 작품들은 세계 곳곳에 전시되었고, 많은 이들의 찬사를 받았다. 하지만 그녀의 가장 중요한 작품, 지훈과 함께 약속했던 ‘빛을 담는 조각’은 늘 마음 한편의 짐으로 남아 있었다. 아니, 짐이 아니라 지훈과의 연결고리였다. 그녀는 늘 그가 돌아오리라 믿었다.

그때였다. 낡은 작업실 문틈으로 차가운 바람과 함께 작은 종이 조각 하나가 미끄러져 들어왔다. 서연은 고개를 갸웃하며 종이를 주웠다. 낡은 종이 위에는 옅게 바랜 먹으로 글씨가 쓰여 있었다. 익숙한 서체, 하지만 오랜 세월이 흘러 흐릿해진 흔적. 그리고 그 아래, 아주 작게 그려진 낯익은 문양. 어린 시절 지훈과 자신만이 알던 비밀의 표식이었다. ‘별을 품은 눈꽃’.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손끝이 떨렸다. 이것은… 지훈이 보낸 것일까?

그녀는 급히 낡은 코트를 걸치고 작업실을 나섰다. 온 세상이 하얀 눈으로 뒤덮여 발자국마저 희미해지는 골목길을 헤치고 나섰다. 종이에 적힌 곳은 아주 오래된 책방이었다. 서연과 지훈이 어린 시절, 비를 피해 뛰어들곤 했던 낡은 동네 책방. 이제는 문을 닫고 폐허가 되어버린 곳.

책방 앞은 굳게 닫혀 있었다. 쌓인 눈 위로 발자국 하나 없었다. 서연은 실망감에 한숨을 쉬었다. 착각이었을까? 그때, 문득 그녀의 시선이 책방 유리창 한쪽에 닿았다. 굵은 눈발이 덮쳐 흐릿해진 유리창 너머, 낯선 그림자가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 그림자가 스친 자리에는, 방금 전 종이에서 보았던 ‘별을 품은 눈꽃’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지훈…!” 서연은 무심코 이름을 내뱉었지만, 돌아오는 것은 흩날리는 눈발과 바람 소리뿐이었다. 분명 누군가 있었다. 그는 이곳에 자신을 유인한 것일까? 아니면 다른 누군가가?

서연은 떨리는 손으로 책방 문을 밀었다. 삐걱이는 소리와 함께 굳게 잠겨 있던 문이 거짓말처럼 스르르 열렸다. 안에서는 곰팡이 냄새와 눅눅한 먼지 냄새가 뒤섞여 올라왔다.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것은 쓰러져 있는 책장들과 먼지 쌓인 책들뿐이었다. 그녀는 휴대폰 플래시를 켜고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섰다.

책장 사이를 헤치고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공기는 더욱 무겁게 가라앉았다. 발밑에서 무언가가 밟혔다. 고개를 숙여 플래시를 비추자, 낡은 가죽 수첩이 보였다. 수첩을 집어 들자 먼지가 풀썩 일어났다. 수첩의 첫 페이지에는 삐뚤빼뚤한 글씨로 ‘지훈의 비밀 노트’라고 쓰여 있었다. 서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것은 분명 지훈의 것이었다. 어릴 적, 지훈이 자신만의 비밀들을 기록하겠다며 늘 들고 다니던 바로 그 수첩이었다.

가슴이 터질 듯 뛰었다. 수첩을 펼치자, 빛바랜 그림들과 알 수 없는 암호 같은 글귀들이 가득했다. 그리고 마지막 페이지에 다다르자,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는 한 문장이 있었다. ‘빛을 담는 조각을 완성하려면, 눈꽃이 피어나는 가장 높은 곳으로.’

눈꽃이 피어나는 가장 높은 곳. 그곳은… 그들만이 알던 언덕 위의 작은 천문대를 의미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곳에서 지훈은 별을 보며 조각의 아이디어를 떠올리곤 했다. 서연은 수첩을 품에 안고 황급히 책방을 나섰다. 그녀의 눈에 비치는 눈 덮인 세상은 더 이상 차갑지 않았다. 이제 그녀는 가야 할 곳을 알았다.

그때, 책방 문턱을 나서려던 서연의 귀에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연 씨, 아직도 그 아이를 찾는 겁니까?”
몸이 굳었다. 돌아보니 어둠 속에서 희미한 인영 하나가 서 있었다. 날카로운 눈매와 굳게 다문 입술. 그녀의 오랜 경쟁자이자, 때로는 조력자였던 조각가 이경이었다. 그는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한 발자국 더 다가섰다. “헛수고예요. 그 약속, 이제는 놓아줄 때가 됐습니다.”
“당신이 여긴 왜…?” 서연의 목소리에는 경계심이 가득했다.
이경은 굳은 얼굴로 책방 안을 흘끗 보더니 말했다. “당신 혼자만 그 아이를 찾는 줄 알았습니까? ‘빛을 담는 조각’… 그건 단순한 조각이 아니죠. 그걸 완성하면 세상이 뒤집힐 수도 있다는 걸 당신은 모르고 있나요?”

이경의 말에 서연의 심장이 다시 한번 내려앉았다. 지훈과의 순수했던 약속 뒤에, 그녀가 알지 못하는 거대한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일까? 이경은 더 이상 설명하지 않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가 남긴 말들은 차가운 눈발처럼 서연의 마음속에 박혔다. 혼란과 불안이 엄습했지만, 그녀의 손에 들린 지훈의 수첩은 따뜻한 온기를 전해왔다.

밤하늘에서는 여전히 눈꽃이 흩날렸다. 서연은 수첩을 꼭 쥐고 언덕 위의 천문대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이 눈이 그날의 약속을 완성하는 마지막 실마리일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동시에, 거대한 미스터리의 시작이라는 것도. 지훈은 어디에 있을까? 그리고 그 ‘빛을 담는 조각’에 숨겨진 진실은 무엇일까? 차가운 겨울밤, 서연의 심장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강렬한 예감으로 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