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은 온통 하얀 세상이었다. 함박눈이 쉴 새 없이 쏟아져 내리며 도시의 모든 소음을 부드럽게 감쌌다. 서연은 따뜻한 머그컵을 두 손으로 감싼 채 창가에 기대어 앉았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생강차의 향이 코끝을 간질였지만, 그녀의 마음은 여전히 저 바깥의 겨울 풍경처럼 시렸다.
오늘은 유난히 눈이 많이 내렸다. 마치 오래된 기억의 빗장을 열어젖히기라도 하려는 듯이. 서연의 시선은 어느새 탁자 위에 놓인 낡은 나무 조각상에 닿았다. 작고 서투른 솜씨로 깎아 만든 새 한 마리. 그을리고 마모된 표면에는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그것은 15년 전, 그날의 잔재였다.
흩날리는 눈꽃 속, 맹세의 그림자
차디찬 공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어린 서연은 지훈의 품에 얼굴을 묻고 몸을 떨었다. 북한산의 한적한 오솔길, 예상치 못하게 쏟아진 폭설에 두 아이는 길을 잃었다. 이미 해는 지고 있었고, 앙상한 나뭇가지 위로 쌓인 눈은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듯 위태로워 보였다.
“서연아, 괜찮아. 내가 있잖아.” 지훈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그의 작은 어깨는 서연을 감싸 안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우리, 약속하자. 꼭 여기서 무사히 내려가면… 어떤 일이 있어도 서로를 놓지 말자.”
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눈물로 얼룩진 뺨 위로 하얀 눈송이가 내려앉아 금세 녹아내렸다. “응… 그리고 우리, 언젠가 꼭 여기에 다시 오자. 그때는 이렇게 무서운 날 말고, 예쁜 눈꽃이 피는 날에. 그리고… 그리고…”
지훈은 서연의 말을 기다렸다. 그때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길가에 쓰러진 작은 새 한 마리였다. 이미 싸늘하게 굳어버린. 지훈은 손을 뻗어 그 새를 조심스럽게 감쌌다.
“그리고… 언젠가 우리가 힘든 사람을 돕는 멋진 어른이 되어서, 저 새처럼 외롭고 힘든 사람들이 다시 날아오를 수 있게 해주는 사람이 되자. 서로 약속하는 거야. 이 눈꽃 아래에서.” 서연의 말이 이어졌다. 지훈은 주머니칼을 꺼내 들었다. 떨리는 손으로 그는 작은 나무 조각을 깎기 시작했다. 그날의 새를 기억하기 위해. 두 아이의 약속을 새기기 위해.
그렇게 밤을 새워 눈과 추위와 싸운 끝에, 다음 날 아침 그들은 극적으로 구조되었다. 하지만 그날의 약속은 험난한 세월 속에서 점차 희미해져 갔다. 지훈은 부모님을 따라 갑자기 해외로 떠났고, 서연은 그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악착같이 살았다. 유명한 화가로 성공했지만, 늘 마음 한구석에는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결정의 갈림길, 그리고 돌아온 그림자
서연은 오늘 중요한 결정을 해야 했다. 뉴욕의 유명 갤러리에서 파격적인 조건으로 초청장을 보냈기 때문이었다. 오랜 기간 꿈꿔왔던 기회였다. 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면, 그녀는 지난 세월 동안 지켜왔던 모든 것을 뒤로해야 했다. 특히, 그녀가 어린 시절부터 몰래 후원하며 키워온 예술학교 아이들을 두고 떠나야 했다.
“결국, 나는 그때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걸까…” 서연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그녀는 그 아이들에게서 과거의 자신과 지훈을 보았다. 외롭고 힘들지만, 빛나는 재능과 희망을 품고 있는 아이들. 그들을 돕는 것이 마치 지훈과의 약속을 이어가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했다.
바로 그때, 현관문 벨이 울렸다. 서연은 문득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이 눈 오는 날, 누가 찾아온 걸까. 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이내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의 심장은 쿵, 하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문 앞에는 눈을 뒤집어쓴 채 서 있는 한 남자가 있었다. 훌쩍 자란 키, 어른이 된 얼굴, 하지만 어딘가 익숙한 눈빛. 그의 손에는 작은 나무 상자가 들려 있었다.
“서연아… 오랜만이야.” 남자의 목소리였다. 15년 만에 다시 듣는, 잊을 수 없는 목소리. 지훈이었다.
서연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눈물만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지훈은 그녀의 얼굴을 보자마자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그도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였다. 그의 눈빛은 여전히 그날의 지훈과 같았다. 무언가를 약속하고, 지키려 애쓰는. 그리고 그 눈에는 서연을 향한 그리움과 미안함이 가득했다.
“내가 너무 늦었지… 미안해.” 지훈이 말했다. “나, 네가 여기에 있다는 소식 듣고… 혹시나 해서 찾아왔어.”
그는 들고 있던 나무 상자를 서연에게 내밀었다. 조심스럽게 상자를 열자, 그 안에는 낡고 빛바랜 또 하나의 나무 조각상이 들어 있었다. 서연의 손에 있던 것과 똑같은, 서툰 솜씨의 작은 새 한 마리. 지훈이 그때 북한산에서 깎았던 바로 그 새였다.
“나… 그날 약속, 잊지 않았어. 너도 잊지 않았을 거라고 믿었어.” 지훈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래서 돌아왔어. 더는 늦기 전에, 우리가 함께 해야 할 일이 있다고 생각했어.”
서연은 눈물이 뒤섞인 시선으로 지훈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마음속에 쌓여 있던 굳은 얼음이 녹아내리는 듯했다. 오랜 시간 잊고 살았던 약속, 혹은 애써 외면하려 했던 약속이 다시금 선명하게 그녀를 덮쳤다. 눈꽃이 흩날리던 그날의 맹세. 그리고 지금, 그녀가 서 있던 갈림길.
창밖으로는 여전히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마치 두 사람의 재회를 축복하듯이, 혹은 앞으로 그들이 헤쳐나갈 길을 예고하듯이. 서연은 지훈을 안으로 들였다. 닫혔던 문이 다시 열리고, 차가운 바람을 타고 들어온 눈송이가 두 사람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15년 전의 약속이, 겨울 눈꽃이 내리던 날의 맹세가, 이제야 비로소 다시 시작될 참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