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녘, 고요만이 세상을 감싸 안은 시간이었다. 지우는 잠 못 이루고 침대에서 뒤척였다.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스탠드 불빛이 오래된 나무 책상 위, 낡은 일기장을 비추고 있었다. 밤이 깊어질수록 마음의 그림자도 길어지는 법인지, 요즘 그녀는 유난히 불안하고 혼란스러웠다.
차게 식은 공기를 가르며 자리에서 일어난 지우는 조심스럽게 일기장 앞으로 다가섰다. 할머니의 손때 묻은 표지, 닳고 닳아 부드러워진 가죽은 지우의 손길에 익숙하게 감겼다. 수백 번도 더 펼쳐 보았던 페이지들이었지만, 때로는 잊었던 문장이, 때로는 새로운 의미가 심장을 저릿하게 만들곤 했다. 오늘밤은 또 어떤 할머니의 숨결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까.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페이지를 넘기다, 지우의 시선이 한곳에 멈췄다. 여느 때보다도 꾹꾹 눌러 쓴 듯한 글씨, 군데군데 번져 흐릿해진 먹물이 마치 할머니의 눈물 자국 같았다. 날짜는 1968년 가을, 그녀가 태어나기도 훨씬 전의 시간이었다.
할머니의 일기
1968년 10월 27일. 맑음. 그러나 내 마음은 비바람 몰아치는 밤.
오늘, 경아를 떠나보냈다. 작은 가슴에 안은 채 서울역 플랫폼에 서 있을 때, 내 세상은 멈춰버린 듯했다. 차갑게 불어오는 바람은 내 볼을 스치는 것이 아니라, 내 심장을 찢어 발기는 것만 같았다. 핏덩이 같은 내 아이, 경아를 더는 내 품에 안을 수 없다는 사실이 뼈아팠다.
그 아이의 작은 손가락이 내 옷깃을 잡았을 때,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듯했다. 어미의 이기심이라 욕해도 좋다. 다만, 내가 굶주린 이 세상에서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에. 너를 잃어버릴까 두려웠기에. 더 나은 삶을 선물하고 싶었다. 따뜻한 밥 한 끼, 해지지 않은 옷 한 벌이라도 입히고 싶었다. 그들의 품이라면 네가 웃을 수 있으리라, 행복할 수 있으리라 애써 믿었다.
기차는 그렇게 매정하게 나를 두고 떠나갔다. 뿌연 증기 속으로 사라지는 경아의 작은 뒷모습을 보며,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하염없이 울었다. 내 모든 삶의 의미가, 희망이, 그 증기 속으로 함께 사라지는 것 같았다. 다시는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절망감이 목구멍을 틀어막았다.
부디, 부디 그 아이가 행복하기를. 나를 원망하지 않기를. 언젠가 이 어미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이해해주기를. 내 가슴속에 영원히 피어나는 한 송이 꽃처럼, 너는 내 기억 속에서 시들지 않을 것이다. 내 숨이 다하는 날까지, 너를 위해 기도할 것이다.
일기장을 읽어 내려가던 지우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경아’. 그 이름은 가족 누구도 언급한 적 없는 이름이었다. 늘 어딘가 슬픔이 깃들어 있던 할머니의 눈빛, 가끔 밤늦게 들려오던 낮은 흐느낌의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할머니에게는, 엄마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또 다른 자식이 있었다니. 그것도 그렇게 절절한 이별을 겪어야만 했던 아픔이 있었다니.
지우는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평생을 강인하고 억척스러운 할머니로만 알았던 그녀에게 이토록 사무치는 아픔이 숨겨져 있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 시절, 가난과 혼란 속에서 어미가 겪어야 했던 선택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웠을까. 자식을 떠나보내야 했던 그 마음은 또 얼마나 찢어졌을까.
지우의 눈가에 뜨거운 눈물이 맺혔다. 그것은 할머니를 향한 안쓰러움과 더불어, 알 수 없는 연민과 죄책감 같은 것이었다. 자신이 누려왔던 모든 편안함과 행복이, 어쩌면 할머니의 그 희생 위에 세워진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경아라는 존재가 이 가족의 역사 속에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었을 상실감과 고통이 생생하게 전해져 왔다.
“할머니…”
지우는 텅 빈 방 안에서 나지막이 할머니의 이름을 불렀다. 목이 메어 더 이상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일기장을 꼭 끌어안은 채, 지우는 할머니의 체온이 여전히 남아있는 듯한 종이 위에 얼굴을 묻었다. 오랫동안 잊혔던 슬픔이, 세월의 벽을 넘어 그녀에게 전해지는 듯했다.
밤은 더욱 깊어졌지만, 지우의 마음속에는 한 줄기 새로운 빛이 떠올랐다. 단순한 슬픔을 넘어, 할머니의 강인함과 사랑, 그리고 그 모든 아픔 속에서도 삶을 지켜낸 숭고한 어머니의 모습을 보게 된 것이다. 경아라는 이름은 이제 지우의 가슴속에 살아 숨 쉬는 하나의 질문이자, 그녀가 풀어야 할 숙제처럼 다가왔다.
어쩌면, 이 일기장은 단순한 과거의 기록이 아닐지도 모른다. 지우가 잊힌 시간을 파헤치고, 할머니의 미처 다하지 못한 사랑을 찾아내도록 이끄는 나침반일지도. 지우는 조용히 일기장을 덮었다. 경아라는 이름이, 그리고 그 이름이 품고 있는 모든 이야기가, 이제 그녀의 새로운 여정의 시작을 알리고 있었다.
내일 아침이 오면, 그녀는 이 숨겨진 아픔의 실마리를 어떻게 풀어 나갈 것인가. 할머니의 낡은 일기장은, 오늘도 여전히 살아있는 가족의 역사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