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찾아온 길고양이와의 대화 – 제350화

벤치에 앉은 지우의 어깨 위로 늦가을의 차가운 공기가 내려앉았다. 앙상한 가지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땅바닥에는 뒹구는 낙엽들만이 지난 계절의 흔적을 말해주고 있었다. 수많은 계절이 별이와 함께 흘러갔다는 사실이 새삼스레 가슴을 저몄다. 지우는 주머니 속으로 손을 깊숙이 찔러 넣으며 멀리 아파트 불빛들을 응시했다. 그 불빛들이 꼭 붙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는 기억의 조각들처럼 아스라했다.

그때였다. 털 끝 하나 흐트러짐 없이 고요히, 별이가 지우의 발치에 모습을 드러냈다. 어느새 털은 더 북실해져 작은 어둠 속에서도 희미하게 빛나는 듯했다. 지우는 고개를 숙여 별이를 내려다보았다. 말없이 다가와 주는 그 존재가, 익숙한 온기처럼 마음을 감쌌다.

“별아, 오늘도 왔구나.”

지우는 별이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별이는 눈을 가늘게 뜨고는 지우의 손길을 온전히 받아들였다. 지우는 다시 시선을 먼 곳으로 돌리며 조용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혼잣말 같기도 했고, 오랫동안 묻어두었던 비밀을 털어놓는 고백 같기도 했다.

“요즘 들어 이상한 꿈을 꿔. 낡고 좁은 길을 걷는데, 아무리 걸어도 끝이 없는 길이야. 그리고 어디선가 희미한 노랫소리가 들리는데, 잡으려 하면 사라지고…. 그런 꿈이 계속 반복돼.”

별이는 지우의 이야기를 듣는 듯 고요히 앉아 있었다. 이따금 고개를 갸웃거리거나, 느리게 눈을 깜빡이곤 했다. 지우는 별이의 반응 속에서 자신만의 대화를 찾았다. 수백 번의 만남 동안 쌓아온 무언의 이해였다.

“그 길 끝에 뭐가 있을지, 아니면 아예 끝이 없는 건지…. 가끔은 그냥 포기하고 싶어져. 잡히지 않는 것에 대한 미련은 왜 이렇게 질긴 걸까. 떨어져 버린 낙엽은 미련 없이 날아가는 것 같던데, 사람 마음은 왜 이리 쉬이 놓지를 못하는 걸까?”

별이는 지우의 손에 제 머리를 작게 비볐다. 부드러운 털의 감촉이 스산했던 마음을 미미하게나마 데워주었다. 지우는 별이의 행동에서 위로를 느꼈다. 그저 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어떤 말보다 깊은 공감이 전해지는 순간이었다.

“별아, 넌 후회라는 걸 아니? 어쩌면 그 꿈속의 길이 내가 과거에 두고 온 어떤 후회인지도 모르겠어. 붙잡을 수도, 되돌릴 수도 없는 그런 것들 말이야.”

별이는 지우의 질문에 대답하듯, 자리에서 스르륵 일어나 벤치 가장자리로 걸어갔다. 그리고는 벤치 틈새에 끼어 있던 작은 낙엽 하나를 코로 톡톡 건드렸다. 가을바람에도 떨어지지 않고 혼자 남아 있던, 선명한 갈색의 낙엽이었다. 별이는 그 낙엽을 앞발로 살살 밀어 지우의 발치로 가져다 놓았다.

지우는 별이와 낙엽을 번갈아 보았다. 그 작은 잎은 이미 나무에서 떨어져 나왔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지우의 발에 닿는 낙엽에서, 알 수 없는 깨달음이 밀려왔다. 떨어졌어도, 여전히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 사라진 것이라 해도 그 흔적은 소중할 수 있다는 것.

“그래, 별아. 떨어져도 아름다운 것이 있다는 걸… 너는 늘 그렇게 가르쳐 주는구나.”

지우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차갑게 얼어붙었던 마음에 온기가 퍼지는 듯했다. 낙엽을 보며, 지우는 잡으려 애썼던 꿈속의 길과 놓지 못했던 후회의 의미를 조금은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길은 사라져도, 그 길 위에서 보았던 풍경과 느꼈던 감정은 소중히 남을 수 있다는 것을.

별이는 다시 지우의 무릎 위로 뛰어올라 작게 몸을 웅크렸다. 스르륵 울리는 작은 골골송이 어둠이 짙어지는 공원을 가득 채웠다. 지우는 별이의 부드러운 털을 쓰다듬으며, 이제는 조금은 가벼워진 마음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수많은 별들이 지우와 별이의 머리 위에서 조용히 빛나고 있었다. 길은 어쩌면 끝이 없는지도 몰랐지만, 그 길을 함께 걸어줄 존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지우의 세상은 조금 더 따스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