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눈꽃이 내리던 날의 약속 – 제915화

시간의 발자국, 다시 눈 위에 찍히다

창밖으로 회색빛 하늘이 흩뿌리는 함박눈을 은채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홉 겹으로 쌓인 지난 세월의 무게가, 차가운 유리창을 통해 밀려들어오는 겨울 공기처럼 가슴을 에워쌌다. 작은 스튜디오는 그녀의 오랜 친구이자 고독한 안식처였다. 벽에 걸린 수많은 그림들은 지난날의 풍경과 미소, 그리고 눈물들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 그림에도 온전히 담아낼 수 없는, 그녀의 심장 가장 깊은 곳에 얼음처럼 박힌 하나의 기억이 있었다. 하얀 눈꽃이 흩날리던 날의 약속.

“또 눈이 내리는군, 그날처럼…” 은채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녀의 손에 들린 낡은 사진 한 장. 빛바랜 사진 속에는 앳된 얼굴의 그녀와 한 남자가 어깨를 기댄 채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겨울바람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횃불 같았고, 그녀의 미소는 그 횃불에 녹아내리는 눈꽃처럼 순수했다. 그날, 이 세상의 모든 눈이 자신들의 이별을 축복하기 위해 내리는 것 같다고, 그는 농담처럼 말했었다.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눈이 다시 녹아내릴 때까지 돌아오겠다고, 손가락을 걸고 맹세했다.

하지만 아흔 번이 넘는 눈꽃이 피고 지는 세월 동안,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는 기다렸고, 또 기다렸다. 계절이 바뀌고, 세상이 변하고, 그녀의 머리카락에도 서리가 내릴 때까지.

예상치 못한 방문

정적을 깬 것은 문을 두드리는 소리였다. 망치로 심장을 내려치는 듯한 불길한 예감에 은채는 손에 들린 사진을 서둘러 뒤집었다. 열린 문틈으로 겨울 칼바람과 함께 낯선 이가 들어섰다. 짙은 코트 차림의 중년 여성은 정중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실례합니다. 혹시 이은채 씨 되십니까?”

은채는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여인은 봉투 하나를 건넸다. 봉투에는 오래된 법률사무소의 이름이 찍혀 있었다.

“고 장준서 씨의 유언장 관련해서 연락드렸습니다. 은채 씨께서 수혜자로 지정되어 계십니다.”

그 순간, 은채의 세상은 멈춰 섰다. ‘장준서’. 그 이름은 그녀의 심장 가장 깊은 곳, 얼어붙은 시간 속에 봉인되어 있었다. 유언장? 수혜자? 그가, 그가 죽었다고? 아니, 이미 오래전에 죽은 사람으로 치부하고 살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녀의 가슴 한켠에는 늘 꺼지지 않는 작은 불씨가 있었다. 혹시나 하는. 언젠가는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그 불씨가 지금, 차가운 현실이라는 폭설에 덮여 꺼져버리는 순간이었다.

“준서가… 죽었다고요?” 그녀의 목소리는 갈라지고 흔들렸다.

“3년 전, 해외에서 지병으로 사망하셨습니다. 유언장 개봉은 이제야 절차가 마무리되어… 죄송합니다.” 여인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3년 전. 그는 이미 3년 전에 이 세상을 떠났지만, 그녀는 여전히 그의 그림자를 좇고 있었다는 사실이 은채를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다. 그녀의 기다림은, 이제 아무 의미도 없는 허망한 메아리가 되어버린 것만 같았다.

남겨진 조각들

여인이 돌아간 후, 은채는 멍하니 봉투를 뜯었다. 유언장의 내용은 간결했다. 장준서 명의의 작은 숲속 오두막 한 채, 그리고 금고 하나. 오두막 주소와 금고 열쇠가 동봉되어 있었다. 오두막 주소를 확인한 은채의 눈이 커졌다. 그곳은 바로 그들이 젊은 시절, 겨울 눈꽃이 흩날리던 날 약속을 나누었던 숲, 그 숲 깊숙한 곳이었다.

차가운 손으로 주소를 쓰다듬는 그녀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가 죽었다는 슬픔보다는, 그가 마지막까지 그 약속의 장소 근처에 머물렀다는 사실이, 그리고 그녀에게 그 흔적을 남겼다는 사실이 더 큰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는 약속을 잊지 않았던 것이다. 돌아오겠다는 약속. 그리고 그녀가 기다려주기를 바랐던 그의 간절한 마음이, 유언장이라는 차가운 종이 한 장을 통해 다시 그녀에게 닿았다. 그녀의 기다림이 헛되지 않았다는, 너무 늦게 도착한 위로였다.

다음 날 아침, 여전히 눈은 세상을 하얗게 덮고 있었다. 은채는 낡은 트렁크 하나를 들고 숲을 향했다. 눈길은 미끄러웠고, 쌓인 눈은 발목까지 잠겼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숲은 고요했다. 나뭇가지마다 하얀 눈꽃이 만개하여, 마치 수천 개의 작은 약속들이 매달려 있는 것 같았다.

얼마를 걸었을까, 나무들 사이로 작은 오두막 한 채가 모습을 드러냈다. 지붕에는 눈이 수북이 쌓여 있었고, 굴뚝에서는 연기가 피어오르지 않았다. 오두막 문을 열자, 차가운 공기와 함께 오래된 나무 냄새가 은채를 맞았다. 낡은 가구들과 벽난로, 그리고 책들이 빼곡한 책장이 눈에 들어왔다. 그 모든 것에서 준서의 체취가 느껴지는 듯했다.

벽난로 옆에는 작은 금고 하나가 놓여 있었다. 동봉된 열쇠로 금고를 열자, 안에는 낡은 일기장 한 권과 작은 나무 상자가 들어 있었다. 일기장을 펼치자, 준서의 익숙한 필체가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1973년 12월 24일. 눈꽃이 내리던 날, 은채와 약속했다. 돌아오겠다고. 기다려달라고. 나는 이 숲에 그 약속을 묻고, 너에게 돌아갈 길을 찾을 것이다.>

은채의 손이 떨렸다. 그리고 다음 장을 넘겼을 때, 그녀의 눈은 믿을 수 없는 문장에 고정되었다.

<오랫동안 고뇌했다. 나의 운명은 너를 위협할 수밖에 없었다. 어둠 속에서 너를 지키는 것,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랑이었다. 네가 행복하기를 바랐다. 내가 없는 세상에서…>

마지막 페이지에는, 그녀가 오래전 준서에게 선물했던 낡은 손수건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 갈색 잉크로 쓰인 마지막 문장이 은채의 심장을 꿰뚫었다.

<결코 너를 잊은 적 없었다. 너의 모든 계절에 눈꽃이 내리기를 바랐다. 그리고 이 겨울, 마침내 너에게로 돌아갈 길을 찾았다. 나의 기다림, 이제 끝이 보인다. 은채, 나의 사랑…>

일기장의 마지막 페이지는 날짜도 없이 텅 비어 있었다. 그는 3년 전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그의 마지막 글은, 마치 그가 아직 살아있는 것처럼, 그녀를 향한 간절한 염원을 담고 있었다. 금고 안에 있던 작은 나무 상자를 열자, 차가운 금속 목걸이 하나와 함께 또 한 장의 낡은 종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목걸이는 은채가 젊은 시절, 준서에게 주었던 커플 목걸이의 나머지 한 조각이었다. 종이에는 삐뚤빼뚤한 글씨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나의 모든 것, 나의 모든 기다림, 이 목걸이와 함께 너에게 닿기를. 겨울 눈꽃이 다시 만개하는 날, 그 숲에서 너를 기다리마.>

그는 죽기 직전까지, 그 숲에서 그녀를 기다렸던 것이다. 그 숲이 자신들의 마지막 약속 장소라는 것을 기억하며. 은채는 주저앉았다. 오두막 창밖으로 눈은 쉼 없이 내리고 있었다. 그녀의 눈물과 함께, 준서의 마지막 약속이 오두막 안에 가득 찼다. 그는 떠났지만, 그의 사랑은, 그의 기다림은, 이 겨울 눈꽃처럼 영원히 피어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이제, 또 다른 약속의 시작점에 서 있었다. 그가 기다리던 곳에서, 그를 다시 기다리는… 어쩌면, 이것이 그들의 마지막 겨울 이야기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희미한 희망을 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