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잃어버린 시간 여행자 – 제921화


그것은 얼음처럼 차가운 진실이었다. 이안의 심장을 꿰뚫고 지나가는 칼날처럼 날카롭고, 고통스러웠다. 수많은 시간을 방황하며 찾아 헤맸던 조각난 기억의 파편들이, 지금 이 순간 엘리시아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과 함께 비틀린 그림자를 드리웠다.

배신자의 미소

시간의 흐름이 정지된 듯 고요한, 미래 도시의 가장 깊숙한 심장부에 위치한 시공간 연구실. 푸른빛이 희미하게 감도는 고대의 기계장치들이 웅웅거리는 소리만이 정적을 깨뜨렸다. 그 기계장치들 사이로 빛줄기가 어둠을 가르고, 이안과 엘리시아의 얼굴을 번갈아 비췄다. 엘리시아의 얼굴에는 미묘한 미소가 걸려 있었는데, 그것은 연민인지, 혹은 승리감인지 알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었다.

“오랜만이야, 이안. 아니, 본래의 너는 지금의 너와는 너무도 다른 존재였으니, 이안이라는 이름조차 너의 진짜 이름은 아니겠지.”

엘리시아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그 속에는 이안이 감히 헤아릴 수 없는 오랜 시간의 무게가 실려 있었다. 이안은 손에 쥔 시공간 안정기를 꽉 쥐었다. 그 금속의 차가운 감촉만이 지금 자신이 현실에 존재한다는 유일한 증거 같았다.

“말도 안 돼… 그동안 나를 도왔던 모든 것이… 거짓이었다는 말인가? 나의 기억이 봉인된 것이 당신의 계획이었다고?”

이안의 목소리는 분노와 배신감으로 격렬하게 떨렸다. 엘리시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계획이 아니었어. 그것은 선택이었지. 네 스스로의 선택. 하지만 이해해. 기억을 잃은 네가 그것을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을 테니까.”

엘리시아의 눈빛은 이안의 눈 깊숙한 곳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 그녀는 천천히 이안에게 다가섰다. 이안은 자신도 모르게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지난 수백 화 동안, 엘리시아는 이안의 유일한 안내자이자, 가장 신뢰하는 동반자였다. 그녀의 조언은 언제나 옳았고, 그녀의 지식은 한계를 몰랐다. 이안의 잃어버린 기억을 찾는 여정은 그녀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거대한 기만극이었다니.

“거짓말 마! 내가… 내 스스로 기억을 지웠다고? 왜? 대체 왜 그래야만 했지?”

잊혀진 선택

“이안, 너는 시공간의 수호자이자, 균형을 지키는 자였어. 과거의 너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힘을 지녔고, 그 힘을 휘둘러 시공간의 위기를 수없이 막아냈지.”

엘리시아는 거대한 홀 중앙에 위치한 수정 구체에 손을 얹었다. 구체 안에서 시공간의 파편들이 빠르게 명멸했다. 수많은 시대의 풍경과 얼굴들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마지막 위기는… 너마저 감당하기 힘들었어. 시간 그 자체가 붕괴될 위험에 처했고, 너는 그 대가를 치러야만 했지. 모든 과거의 이안들이 저지른 실책과 비극을 너의 어깨에 짊어진 채로.”

엘리시아의 이야기는 비현실적이었다. 이안은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실책? 비극? 나는 단지 나의 기억을 되찾고 싶었을 뿐이야. 내가 누구인지, 내가 무엇을 잃었는지 알고 싶었다고!”

“그리고 너는 그것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너 자신을 위한, 아니, 모든 시간을 위한 최선의 길이라고 판단했지. 너의 기억 속에는 너무도 많은 고통과, 너무도 많은 책임감이 들어 있었어. 그것들이 온전하게 돌아온다면, 너는 더 이상 지금의 이안으로 존재할 수 없었을 거야. 어쩌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절망에 빠져 시간 그 자체를 부숴버렸을지도 모르지.”

엘리시아의 목소리는 설득력이 있었다. 이안은 숨을 헐떡였다. 머릿속에서 혼란스러운 이미지들이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 거대한 폭발, 찢겨나가는 시공간, 그리고 얼굴 없는 비명들. 그것들은 이안의 기억의 잔해일까, 아니면 엘리시아가 심어놓은 거짓일까?

“네가 봉인한 기억 속에는 너의 가장 사랑했던 이들의 죽음도 있었어. 네가 지키려 했던 문명이 어떻게 절멸했는지에 대한 참혹한 기록도 있었지. 너는… 감당할 수 없을 거라 생각한 거야.”

이안의 손에서 시공간 안정기가 힘없이 떨어져 나갔다. 둔탁한 금속음이 정적을 가르고 울렸다. 사랑했던 이들의 죽음. 그 말은 이안의 가장 깊은 곳을 건드렸다. 잃어버린 기억 속에서 늘 갈망했던, 그러나 잡을 수 없었던 따뜻한 그림자들이 떠올랐다. 그들이 누구였는지, 어떻게 사라졌는지, 이안은 한 번도 알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 그 진실이 너무나도 잔인하게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그럼 당신은… 나를 이용한 것인가? 나를 조종해서… 그저 나의 원래 계획을 따르게 한 것뿐인가?”

이안의 목소리는 기어들어갔다. 분노는 사라지고, 오직 깊은 상처와 절망만이 남았다.

엘리시아는 다시 미소 지었다. 이번에는 더욱 연민이 담긴 미소였다.

“나는 너의 의지를 따른 것뿐이야, 이안. 네가 기억을 봉인하며 세운 마지막 지시. ‘내가 다시 모든 것을 기억하려 할 때, 나를 막아라. 내가 다시 세상을 파괴할 위험에 처할 때, 나를 지켜라.’ 나의 임무는 너를 지키는 것이었어. 너의 본래 의지를 지키는 것. 하지만 이제… 상황이 변했어.”

새로운 위협

수정 구체의 빛이 더욱 강렬해졌다. 그 안에서 어둡고 거대한 그림자가 일렁였다. 형언할 수 없는 존재가 시공간의 틈새를 비집고 나오려는 듯 꿈틀거렸다. 이안의 몸이 순간적으로 경직되었다.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위협이었다. 잃어버린 기억의 심연에서부터 울려 퍼지는 경고음 같았다.

“네가 기억을 봉인하고 잠들어 있던 시간 동안, 네가 막아섰던 그 존재가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어. 붕괴는 더 이상 지연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지. 이제는 네가 기억을 되찾든, 못 되찾든 상관없이 행동해야 할 때야.”

엘리시아는 구체를 가리켰다.

“이 모든 것이 너의 기억을 되찾는 것을 도운 이유이기도 해. 네가 과거의 너로 돌아가지 않기를 바라면서도, 동시에 네가 과거의 너만큼 강해지기를 바랐지. 그 존재를 막으려면, 너의 온전한 힘이 필요해.”

이안은 구체를 응시했다. 그 안에서 느껴지는 압도적인 어둠은 단순히 상상 속의 위협이 아니었다. 그것은 현실이었다. 이안이 기억을 잃은 채 방황하던 수백 화 동안, 이 거대한 위협은 계속해서 자라나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내가 그토록 필사적으로 잊으려 했던 것이… 지금 다시 눈앞에 나타났다는 말인가?”

“그래. 그리고 이번에는 네가 기억을 되찾지 못한다면, 모든 것이 끝날 거야. 네가 지키려 했던 모든 시간, 모든 존재가 사라지겠지.”

엘리시아의 말은 비수처럼 박혔다. 이안은 혼란스러웠다. 배신감과 분노, 절망과 동시에 새로운 책임감이 거대한 파도처럼 밀려왔다. 자신이 잊고 싶어 했던 진실, 자신을 파괴할 수도 있었던 기억들. 하지만 그것들이야말로 지금의 위협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열쇠였다.

이안은 천천히 몸을 숙여 떨어진 시공간 안정기를 집어 들었다. 차가운 금속이 손에 닿자, 이안의 눈빛이 전과는 다른 결의로 빛났다.

“그렇다면… 나에게 그 기억을 돌려줘. 그 어떤 고통스러운 진실이라도…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무게라 할지라도… 이제는 알아야겠어.”

엘리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표정은 이제 미소 대신 슬픔으로 물들어 있었다.

“좋아. 하지만 명심해, 이안. 일단 문이 열리면… 다시는 되돌릴 수 없을 거야. 너는 다시 고통 속으로 걸어 들어가야 해. 네가 잊고 싶어 했던 너의 진짜 정체와 마주해야만 할 거야. 시공간의 가장 위대한 영웅이자, 가장 비극적인 존재였던 너 자신을 말이야.”

이안은 수정 구체를 향해 걸어갔다. 구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어둠의 기운과 엘리시아의 마지막 경고가 이안의 심장을 압박했다. 하지만 이안은 더 이상 도망칠 수 없었다. 이안의 잃어버린 모든 기억들이, 시공간의 운명이, 지금 이 순간 이안의 선택에 달려 있었다.

구체의 표면이 물결치듯 흔들리더니, 이안의 눈앞에서 거대한 균열이 생겨났다. 그 안에서 아득한 과거의 환영들이 폭풍처럼 몰아쳤다. 이안은 그 빛 속으로 망설임 없이 손을 뻗었다. 그리고 거대한 기억의 파도가 이안을 덮쳐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