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모퉁이 작은 빵집의 기적 – 제358화

사라진 줄 알았던 온기

창밖으로는 가을비가 으슬으슬 내리고 있었다. 빗방울은 축축한 회색빛 공기를 머금고 빵집 유리창에 맺혔다가 길게 흘러내렸다. 미영은 멍하니 그 빗줄기를 바라보았다. 며칠째 이어지는 빗속에서, 그녀의 마음도 마치 눅눅한 빵처럼 자꾸만 가라앉는 듯했다.

오늘도 그녀는 산모퉁이 작은 빵집으로 향했다. 딱히 무언가를 살 생각도 아니었다. 그저 따스한 온기와 갓 구운 빵 냄새에 이끌려 마치 습관처럼 발걸음을 옮겼을 뿐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달콤하고 고소한 향기가 빗물에 젖어 싸늘해진 몸을 부드럽게 감쌌다. 언제나처럼 아담하고 포근한 공간이었다. 카운터 너머로 흰 제빵사 모자를 쓴 할머니가 미소 짓고 있었다.

“어머, 미영 씨. 비 오는데 고생 많았네.”

할머니의 목소리는 언제 들어도 따스한 모닥불 같았다. 하지만 미영은 그 따스함이 오히려 자신의 마음속 앙상한 가지들을 더욱 도드라지게 하는 것만 같아 괜히 민망했다. “네, 할머니. 그냥 지나가는 길에….” 미영은 애써 밝은 척 대답했지만, 그녀의 눈은 이미 지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한참 동안 빵 진열대 앞을 서성였다. 밤 식빵, 호두 타르트, 소보로 빵…. 가지런히 놓인 빵들은 하나같이 윤기가 흐르고 먹음직스러웠지만, 그 어떤 것도 그녀의 식욕을 자극하지 못했다. 최근 미영의 집에는 알 수 없는 냉기가 감돌았다. 남편과의 사소한 오해가 걷잡을 수 없이 커졌고, 사춘기 아들은 문을 걸어 잠그고 나오지 않았다. 따뜻해야 할 집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지는 것을 느끼며, 미영은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존재처럼 느껴졌다. 어쩌면 이대로 다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감이 그녀를 짓눌렀다.

할머니는 말없이 미영을 지켜보았다. 수십 년간 빵을 구우며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을 마주한 할머니의 눈은, 미영의 겉치레 너머의 감정까지 읽어내는 듯했다. 잠시 후, 할머니는 오븐에서 갓 꺼낸 듯 따끈한 무언가를 작은 쟁반에 담아 미영에게 내밀었다.

“이거 막 나왔어. 오늘은 손님이 많지 않아서… 미영 씨 줄 겸 해서 좀 더 만들었네.”

쟁반 위에는 갓 구워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우유 식빵 한 조각이 놓여 있었다. 겉은 황금빛으로 노릇하게 구워졌고, 속살은 한없이 부드러워 보였다. 달콤하면서도 구수한 우유 향이 코끝을 간지럽혔다. 미영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 빵 조각을 받아 들었다. 따뜻한 온기가 손바닥을 타고 전해져 왔다.

“괜찮아요, 할머니. 전….”

미영이 사양하려 하자, 할머니는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잡으며 작게 속삭였다.

“말하지 않아도 다 알지. 마음이 차가울 땐, 따뜻한 빵 한 조각이 세상 그 어떤 말보다 위로가 될 때가 있단다.”

그 순간, 미영의 눈가가 뜨거워졌다. 참았던 눈물이 기어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다. ‘다 알지’라는 할머니의 한마디는 그녀가 그토록 필요로 했던 이해와 공감이었다. 아무도 자신의 속을 알지 못한다 여겼던 그 외로움이, 할머니의 따뜻한 손길과 갓 구운 빵의 온기 앞에서 스르르 녹아내리는 듯했다.

미영은 작은 우유 식빵 조각을 뜯어 입에 넣었다. 쫄깃하면서도 부드러운 식감이 입안 가득 퍼졌다. 인위적이지 않은 은은한 단맛과 고소함이 혀끝을 감돌았다. 따뜻한 빵 한 조각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자, 마치 차갑게 얼어붙었던 심장이 녹아내리는 것처럼 온몸에 따뜻한 기운이 돌았다. 사라진 줄 알았던 온기가, 실은 아주 가까운 곳에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음을 그녀는 비로소 깨달았다.

밖의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지만, 빵집 안의 공기는 한결 더 따뜻해진 것 같았다. 미영은 빵을 천천히 씹으며 생각했다. 어쩌면 집으로 돌아가도 모든 문제가 당장 해결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오늘, 이 작은 빵집에서 받은 온기는 그녀에게 다시 일어설 작은 용기를 주었다. 차가운 세상 속에서도 자신을 이해해 주고 위로해 주는 이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다시금 숨 쉴 힘을 얻는 기분이었다.

남은 빵 조각을 소중히 움켜쥐며, 미영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내일은, 이 온기를 집으로 가져가 볼 용기가 생길지도 모른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