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공기는 여전히 칼날 같았지만, 강준호의 발걸음은 익숙한 리듬을 타고 있었다. 우편 가방의 무게는 수십 년 세월 동안 그의 어깨에 새겨진 훈장과도 같았다. 햇빛 한 조각 스며들지 않는 우편물 분류실의 형광등 아래, 그의 주름진 손이 봉투들을 쓸어 넘겼다. 익숙한 이름들, 낯선 주소들, 그리고….
“이건 또 뭐람?”
강준호의 눈길이 멈춘 곳은 다른 우편물들과는 확연히 다른, 투박한 종이 꾸러미였다. 겉은 낡은 노끈으로 엉성하게 묶여 있었고, 펜으로 꾹꾹 눌러 쓴 주소는 시간이 바래 여러 번 읽어야 겨우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오래된 주소, 사라진 풍경
수신인: 옛 은행나무 골목 37번지, 그곳을 떠난 이에게
발신인: … (표기 없음)
강준호는 미간을 찌푸렸다. 옛 은행나무 골목 37번지. 그곳이라면… ‘그리움 다방’이 있던 자리였다. 오래전, 동네 사랑방 역할을 톡톡히 했던 그 다방은 이제 고층 빌딩이 들어설 공사 현장이 되어 있었다. 먼지 날리는 흙바닥과 거대한 크레인이 옛 추억을 삼켜버린 지 오래였다.
“수신인이 ‘그곳을 떠난 이’라니… 참 별스러운 분도 많아.”
젊은 후배 우편배달부인 지웅이 건성으로 중얼거렸다. “아마 반송될 거예요, 선배님. 이미 건물도 없고, 누군지 알 수도 없잖아요. 규정상으로는….”
“규정, 규정 하는 것도 좋지만 말이야.” 강준호는 꾸러미를 가방 깊숙이 넣으며 나직이 말했다. “이건 단순한 우편물이 아니야. 오랜 세월을 건너온 이야기 같은 거지.”
그의 마음속에는 늘 ‘이름 없는 편지’들이 있었다. 보낸 이도 받는 이도 불분명했던 그 편지들은, 그에게 단순한 배달부 이상의 의미를 부여했다. 때로는 잊힌 기억을 찾아주었고, 때로는 차마 말하지 못한 마음을 대신 전해주었다. 이 투박한 꾸러미에서도 비슷한 울림이 느껴졌다.
그날따라 강준호의 발걸음은 더욱 무거웠다. 그의 배달 구역은 재개발 바람이 한창이었다. 낡은 주택들은 헐리고, 그 자리에 번쩍이는 새 건물들이 들어섰다. 어린 시절부터 그의 발이 닳도록 오갔던 골목들은 지형을 바꾸고, 사람들의 얼굴도 바뀌어갔다.
옛 은행나무 골목 37번지. 그리움 다방은 그의 청춘과도 같은 곳이었다. 작은 잔에 담긴 진한 커피 향과 흘러나오던 올드팝, 그리고 옹기종기 모여 앉아 인생을 논하던 사람들…. 그 모든 풍경이 스쳐 지나갔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벌써 30년도 더 된 일이었다. 그 다방 탁자 밑에서 발견된, 주소도 이름도 없이 찢어져 버려진 편지 한 조각. ‘사랑해요, 미안해요’라는 단 두 마디가 전부인 편지 조각이었다. 어린 강준호는 그 편지의 주인을 찾기 위해 며칠 밤을 고민했고, 결국 다방 주인 아주머니의 증언과 그의 직감을 동원해 편지 속 주인공을 찾아내기도 했다. 서로에게 상처만 주고 헤어졌던 연인들이었다. 그들은 다시 만나지 못했지만, 편지는 닿아야 할 곳에 닿았다는 안도감이 그에게는 가장 큰 보람이었다.
멈춰선 발걸음
강준호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옛 은행나무 골목에 도착했다. 이제는 ‘옛’이라는 수식어가 무색할 만큼, 은행나무 한 그루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삐걱거리는 철문 너머로 철거된 건물의 잔해가 산처럼 쌓여 있었고, 굴착기가 굉음을 내며 마지막 흔적들을 파헤치고 있었다. 그는 한동안 멍하니 그 풍경을 바라보았다. 그의 발아래에는 수많은 이들의 삶과 이야기가 묻혀 있는 것만 같았다.
주소는 분명 37번지였지만, 이제 그 번지는 의미 없는 숫자에 불과했다. 이 꾸러미는 누구에게 가는 것일까? 누가, 무엇을 위해, 사라진 공간과 불분명한 수신인을 향해 이토록 애틋한 마음을 담아 보낸 것일까?
지웅의 말대로라면, 반송 스티커를 붙여 돌려보내는 것이 맞았다. 하지만 강준호는 그럴 수 없었다. 그의 손에 들린 꾸러미는 차갑게 식어가는 도시 속에서 유일하게 따스한 온기를 품고 있는 듯했다. 마치 오랜 시간 동안 전해지지 못한 누군가의 간절한 염원이 담겨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는 배달 가방을 내려놓고, 꾸러미를 무릎 위에 올렸다. 낡은 종이의 질감이 손바닥에 고스란히 느껴졌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것도 아닌 평범한 꾸러미였지만, 그에게는 마치 조용히 숨 쉬는 생명체처럼 느껴졌다. 어쩌면 이 꾸러미는 과거의 어느 순간, 그리움 다방에서 미처 보내지지 못하고 잊혀졌던 누군가의 편지가 오랜 세월을 넘어 이제야 도착한 것일지도 모른다.
오후 햇살이 먼지 자욱한 공사 현장 위로 부서져 내렸다. 강준호는 천천히 꾸러미를 열어볼까 망설였다. 하지만 곧 마음을 고쳐먹었다. 함부로 열어볼 것이 아니었다. 이 꾸러미에는 주소가 없지만, 분명히 가야 할 곳이 있을 터였다. 그리고 그곳을 찾아내는 것이, 이름 없는 편지를 수없이 배달해 온 그의 마지막 사명 같은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꾸러미를 다시 품에 안았다. 먼지 자욱한 바람이 그의 얼굴을 스쳤다. 강준호의 시선은 잿빛 공사 현장 너머, 보이지 않는 어딘가를 향하고 있었다. 그의 마음속에서는 한 가지 질문이 메아리쳤다. ‘이 꾸러미는… 누구의 그리움일까?’
그의 오랜 경험이 속삭였다. 이 이야기는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