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모퉁이 작은 빵집에는 언제나 따뜻한 공기가 감돌았다. 갓 구운 빵 냄새는 계절의 쌀쌀함을 잊게 할 만큼 포근했고, 오븐의 열기는 차가운 유리창을 넘어 마을까지 온기를 전하는 듯했다. 제법 굵어진 눈발이 창밖을 스치고 지나가는 늦은 오후, 하루는 반죽을 치대던 손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늘 앉던 자리가 텅 비어 있었다. 박 여사님이었다.
어느새 일주일째였다. 평소 같으면 이맘때쯤, 박 여사님은 늘 문을 열고 들어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단팥빵 하나와 따뜻한 차 한 잔을 주문하곤 했다. 무뚝뚝한 표정 뒤로 감춰진 따뜻한 미소가 늘 하루의 마음을 포근하게 만들었지만, 최근 한 달 사이 박 여사님의 얼굴에서는 미소가 사라졌고, 일주일 전부터는 아예 발길이 끊긴 상태였다.
하루는 박 여사님의 마지막 방문을 떠올렸다. 그날, 박 여사님은 단팥빵 대신 식빵 한 봉지를 사 들고 묵묵히 돌아섰다. 평소라면 빵을 고르는 내내 작은 행복이라도 찾은 듯 눈빛이 반짝였을 텐데, 그날의 박 여사님은 마치 텅 빈 인형 같았다. 며칠 전 시장에서 마주친 마을 주민의 한숨 섞인 이야기가 하루의 귀가에 맴돌았다. “박 여사님네, 이번 겨울이 특히 시련인가 봐. 따님도 멀리 가셨고….”
마음 한구석이 텅 비어버린 듯한 쓸쓸함에 하루는 무언가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박 여사님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히 빵 한 조각이 아닐 터였다. 잊고 있던 온기, 잃어버린 미소, 그리고 누군가의 기억이 담긴 따스함. 문득, 오래된 레시피 노트 한 귀퉁이에 끄적여 있던 할머니의 글씨가 떠올랐다. ‘밤이 송골송골 박힌 보드라운 카스텔라. 슬픈 날의 위로.’
하루의 할머니는 마을 어른들이 힘든 시간을 보낼 때면, 늘 이 특별한 밤 카스텔라를 구워 따뜻한 차와 함께 대접하곤 했다. 달콤하면서도 포근한 밤의 향이 슬픔을 감싸 안아주는 듯한 맛. 오랜 시간 잊고 있던 레시피였다. 밤을 다듬고, 부드러운 반죽을 만들고, 오븐에 넣어 익히는 내내 하루의 머릿속에는 박 여사님의 메마른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오븐에서 풍겨 나오는 달콤하고 고소한 밤 카스텔라의 향은 마치 과거의 따뜻한 추억이 현재로 소환되는 듯했다.
갓 구워낸 카스텔라는 아직 온기가 가득했다. 하루는 정성스럽게 카스텔라를 포장하고는 두꺼운 코트를 걸쳤다. 눈은 그쳤지만, 바람은 여전히 차가웠다. 박 여사님 댁은 빵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낡은 대문 앞에 서서 초인종을 누르려던 하루의 손이 망설였다. 혹시 박 여사님에게 부담을 주는 건 아닐까. 하지만 이내 용기를 내어 손을 뻗었다.
“누구세요?”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예상보다 훨씬 더 지쳐 있었다. 문이 조용히 열리고, 박 여사님의 수척한 얼굴이 빼꼼히 보였다. 눈빛에는 생기가 없었고, 뺨은 전에 없이 움푹 들어가 있었다.
“박 여사님, 안녕하세요. 갑자기 찾아와서 죄송해요. 오늘 빵집에서 할머니 레시피로 밤 카스텔라를 구웠는데, 양이 너무 많아서… 혹시 괜찮으시면 드셔 보실까 하고요.”
하루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말하며 따뜻한 카스텔라가 담긴 상자를 내밀었다. 박 여사님은 하루와 카스텔라 상자를 번갈아 보며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다. 이내 그녀의 눈가가 살짝 붉어지는 듯했다.
“고마워요… 이렇게까지….”
박 여사님의 목소리가 떨렸다. 하루는 박 여사님의 손에 카스텔라 상자를 조심스럽게 쥐여 주었다. 따뜻한 온기가 박 여사님의 손으로 전해지는 순간, 박 여사님의 눈가에서 마침내 굵은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우리 딸이 어렸을 때, 제가 처음으로 구워줬던 빵이 밤 카스텔라였어요….”
작게 흐느끼는 박 여사님의 말에 하루는 그저 조용히 그녀의 옆에 서서 기다렸다. 밤 카스텔라는 단순히 빵이 아니었다. 그것은 잊힌 추억을 일깨우는 열쇠였고, 얼어붙은 마음을 녹이는 작은 기적이었다. 박 여사님의 차가웠던 손에서 전해지는 미세한 떨림이 하루에게도 고스란히 느껴졌다. 차가운 겨울바람 속에서, 산모퉁이 작은 빵집의 온기는 그렇게 또 한 번 마을의 가장 어두운 그림자 속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다음 이야기: 박 여사님의 작은 고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