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은 깊었고, 오래된 한옥의 마당에는 가느다란 비가 한결같이 내리고 있었다. 지영은 창밖을 멍하니 응시했다. 빗소리는 귀에 익은 자장가 같기도, 혹은 마음속 불안을 증폭시키는 불길한 전조 같기도 했다. 아버지의 병세는 좀처럼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병원에서 들려오는 의사의 목소리는 매번 더 무겁고 조심스러워졌다. 지영의 어깨를 짓누르는 선택의 무게는 밤이 깊어질수록 더욱 커져만 갔다.
방 한가운데 놓인 낡은 목함 위에는 할머니의 일기장이 조용히 놓여 있었다. 짙은 갈색 가죽 표지는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고, 모서리는 헤지고 색이 바랬지만, 그 존재감만은 여전했다. 어쩌면 그 일기장은 이 집의 가장 오래된 기록물이자, 살아있는 증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지영은 종종 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이 일기장은 지영에게 유일한 위로이자, 알 수 없는 해답을 찾는 나침반이었다.
지영은 찬기운이 스미는 마룻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조심스럽게 일기장을 들어 올렸다. 눅눅한 공기 속에서도 잉크와 종이의 오래된 향이 희미하게 피어올랐다. 무심코 펼친 페이지는 늘 그러하듯, 할머니의 단정한 필체로 빼곡히 채워져 있었다. 오늘따라 유독 눈에 들어오는 날짜는 1978년 늦가을이었다. 지영이 태어나기 한참 전의 시간이었다.
아버지의 이름, 그리고 깊은 고뇌
할머니의 글은 늘 그랬듯, 담담한 어조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 안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가 숨어있었다. 그날의 일기에는 아버지, 그러니까 할머니의 아들인 준호의 이름이 여러 번 등장했다.
“1978년 10월 22일, 바람이 차가워진다. 준호는 오늘도 기침을 멈추지 않는다. 의원은 별다른 차도가 없다고 했다. 폐가 좋지 않으니, 도시의 공기가 더 독이 될 거라며, 차라리 고향으로 돌아가 요양을 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했다. 준호는 고집을 부린다. 그가 일궈놓은 터전을 버릴 수 없다고. 그의 눈빛은 흔들리고 있었지만, 내 앞에서는 언제나 강한 척했다.”
지영은 숨을 들이켰다. 할머니는 늘 아버지를 자랑스러워했지만, 젊은 시절 아버지에게도 그런 아픔이 있었으리라고는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어릴 적부터 강하고 굳건한 존재로만 알았던 아버지의 나약했던 시절이 할머니의 글을 통해 비로소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할머니의 글은 이어졌다.
“나는 갈림길에 섰다. 준호가 평생을 바쳐 일군 그의 꿈을 꺾고, 그를 다시 고향의 품으로 데려와야 하는가. 혹은 그의 의지를 존중하여 이대로 지켜보아야 하는가. 의원은 더 이상 시간이 많지 않다고 했다. 폐는 이미 많이 망가져 있었다. 나는 차가운 밤공기 속에서 하염없이 별을 바라보았다. 내 아들의 생명이 걸린 문제였다. 어떤 선택이 그를 위한 것인가. 어떤 선택이 나중에 후회하지 않을 선택일까.”
지영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할머니의 고뇌는 지금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과 너무나도 닮아 있었다. 아버지의 수술 여부를 결정해야 하는 기로에 선 지영의 마음은 혼란 그 자체였다. 수술은 성공 확률이 희박했고, 실패할 경우 아버지는 남은 시간을 더 큰 고통 속에서 보내야 할지도 몰랐다. 그러나 수술을 포기하는 것은, 어쩌면 희망 자체를 포기하는 것과 같았다. 지영은 할머니의 글에서 마치 거울을 본 듯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세월을 넘어선 위로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자, 필체는 조금 더 힘이 실려 있었다. 며칠이 지난 후의 기록인 듯했다. 아마도 할머니는 그 며칠 밤낮을 고민으로 지새웠을 것이다.
“1978년 10월 28일, 나는 준호에게 고향으로 돌아가자고 말했다. 그는 처음에는 반항했다. 그의 꿈, 그의 자존심, 그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 같았으리라. 그러나 나는 그에게 말했다. ‘아들아, 삶은 단 한 번뿐이다. 네가 쌓아 올린 모든 것은 건강이 뒷받침될 때 비로소 빛을 발한다. 지금은 잠시 멈추고 너의 생명을 돌볼 때다. 네가 살아야, 다시 시작할 수 있다.’ 나는 그의 손을 잡고 울었다. 그 또한 고개를 숙인 채 어깨를 떨었다. 아들의 삶을 택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이것이 최선이라고 믿었다.”
지영은 할머니의 글을 읽으며 왈칵 눈물을 쏟아냈다. 할머니는 그 어려운 선택을 홀로 감당하며, 아들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강단 있는 결정을 내렸던 것이다. 그 용기가 얼마나 대단한 것이었을까. 할머니는 단순히 아들을 요양시킨 것이 아니었다. 아들의 꿈을 잠시 접게 하고, 그의 자존심을 어루만지며, 생명이라는 가장 근본적인 가치를 선택하도록 이끌었던 것이다.
할머니의 다음 문장은 지영의 마음에 깊은 울림을 주었다.
“나는 한 가지를 배웠다. 사랑하는 이를 위한 선택은 언제나 고통스럽지만, 그 고통 속에서도 가장 소중한 것을 놓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후회 없는 선택이란 어쩌면 없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음속 깊이 사랑과 진심이 담겨 있다면, 어떤 결과가 찾아오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감내할 수 있을 것이다. 시간이 모든 상처를 아물게 하지는 못해도, 후회는 조금이나마 덜어줄 것이다.”
지영은 일기장을 가슴에 품었다. 할머니의 글은 단지 과거의 기록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시공간을 넘어 지영에게 건네는 따뜻한 조언이자, 굳건한 격려였다. 아버지의 젊은 시절 아픔을 감싸 안았던 할머니의 손길이 지금, 병마와 싸우는 아버지를 위한 지영의 선택에 용기를 불어넣고 있었다. 후회 없는 선택은 없을지라도, 사랑과 진심이 담긴 선택이라면 어떤 결과든 받아들일 수 있으리라는 할머니의 지혜는 지영의 마음속 어둠을 환하게 밝혔다.
새로운 시작을 향한 발걸음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지만, 빗소리는 더 이상 불안하게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속 혼란을 씻어내리는 듯 시원하게 느껴졌다. 지영은 일기장을 닫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할머니의 말씀이 귓가에 맴도는 듯했다. ‘네가 살아야, 다시 시작할 수 있다.’ 그 말씀은 아버지에게도, 그리고 지금 어려운 결정을 앞둔 자신에게도 해당되는 진리였다.
지영은 이제 무엇을 해야 할지 알 것 같았다. 그녀는 아버지의 생명을 최우선으로 두는 선택을 할 것이다. 설령 그 선택이 아버지의 남은 삶에 큰 변화를 가져오더라도, 고통을 줄이고 평화를 가져다줄 수 있다면 그것이 할머니의 지혜를 따르는 길일 터였다. 두려움은 여전했지만, 그 두려움 속에서도 사랑이라는 단단한 끈이 지영의 마음을 붙들고 있었다. 할머니의 낡은 일기장은 오늘 밤도 지영의 어둠을 밝히는 등불이 되어주었다. 지영은 이제 그 등불을 들고, 새로운 아침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